구경

창덕궁 [2]편

로제로제 2014. 8. 30. 00:46

창덕궁 후원 편


사진은 창덕궁 후원 내의 존덕정(尊德亭)



 


창덕궁 후원

태종의 창덕궁 창건 당시부터 조성되어 창덕궁과 창경궁의 공동 후원(後苑)이 되었다.

임진왜란 때 대부분의 정자가 불타버려서 20여 년간 폐허가 되기도 했으나 1610년 광해군이 복구를 시작하여 역대 왕들에 의해 후원에 소정을 짓고 기화, 이목, 괴석을 모아 화려한 원유를 조성하면서 오늘날의 모습이 완성되었다.

창덕궁 후원은 자연지형을 그대로 살리면서 골짜기마다 인공적인 정원을 만들어 최소한의 인위적인 손질을 더해서 자연을 더 크게 완성시킨 절묘한 솜씨를 자랑한다.

4개의 골짜기에 각각 부용지(芙蓉池), 애련지(愛蓮池), 관람지(觀覽池), 옥류천(玉流泉) 정원이 펼쳐진다.

4개의 정원은 안으로 들어갈수록 크고 개방된 곳에서 작고 은밀한 곳으로, 인공적인 곳에서 자연적인 곳으로 점진적으로 변화하며 결국은 큰 자연인 뒷산 매봉으로 연결된다.

세계 대부분의 궁궐 정원은 보고 즐기기 위한 관상용인데 비해, 창덕궁 후원은 여러 능선과 골짜기를 오르내리며 온몸으로 느끼는 체험 정원이었다. 또한 여러 복합적인 기능을 수용한 장소이기도 했다. 시를 짓고 학문을 논하며 사색에 잠기던 곳이었고 때로 연회를 열고 활쏘기 놀이를 즐기던 곳이었다. 왕이 참관한 가운데 군사훈련도 행해졌고, 왕과 왕비가 백성들의 생업인 농사를 짓고 누에를 치기도 했다.

창덕궁 후원은 ‘비원’(秘苑)으로 익숙한 곳이다. 비원이란 창덕궁과 창경궁에 딸린 북쪽의 정원을 가리키는 말이지만 전통적으로 사용해온 용어는 아니다. 조선시대에는 이곳을 주로 후원(後苑)이라 불렀고, 때로는 내원(內苑), 상림원(上林苑), 금원(禁苑)으로 불렀다. 비원이란 말은 일제강점기부터 유포돼 해방 뒤에도 별 반성 없이 최근까지 통용되고 있는 용어이다.

넓이는 약 9만여 평에 이르며 원래는 창경궁의 후원과 서로 연결되어 구분이 없었으나 일제가 조선 말 창경궁을 창경원으로 개조하면서 두 궁궐의 후원에 담장을 쌓아 지금처럼 분리되었다. 이곳은 조선시대 궁궐의 후원 가운데 가장 넓고 경치가 아름다워 일찍부터 왕실 사람들의 사랑을 받아왔다. 그 때문에 여러 왕에 의해 많은 누정이 지어져서 한때 100여 개 이상의 누각과 정자가 들어서기도 했으나 지금은 누각 18채와 정자 22채만 남아 있을 뿐이다. -안내문 등에서-

 

 


창덕궁 후원(비원) 들어가는 길

 

 


창덕궁 후원(비원)의 관람은 사전에 인터넷으로 신청하여 매회 100명씩만 안내인의 안내에 따라 입장할 수 있습니다. 

  

 


부용지(芙蓉池)

관리 부실인지는 몰라도 녹조현상이 너무 심해요.




어수문(魚水門)과 주합루(宙合樓) - (어수문 위로 주합루가 보인다)

주합루(宙合樓)는 정조 원년(1776년)에 창건된 2층의 누각건물이다. 아래층에는 왕실 직속 기관인 규장각(奎章閣)을, 위층에는 열람실 겸 누마루를 조성했다. 규장각은 정조의 개혁정치를 뒷받침하기 위해 정책 개발과 이를 위한 도서 수집 및 연구기관으로 설립되었다. 정조는 세손 시절부터 아버지인 사도세자를 죽음에 이르게 한 정적들로부터 끊임없는 질시와 위협에 시달렸는데, 이에 굴하지 않고 학문연구와 심신단련에 힘을 써 위대한 계몽군주가 될 수 있었다.

주합루로 오르는 길에 작은 어수문(魚水門)이 있다. “물고기가 물을 떠나서 살 수 없다”는 격언과 같이 통치자들은 항상 백성을 생각하라는 교훈이 담겨진 문으로, 정조의 민본적인 정치 철학을 보여준다. - 안내문에서 -

 

 


부용정

  

부용지(芙蓉池)와 주합루(宙合樓)와 영화당(暎花堂)

주합루(宙合樓)는 후원의 첫 번째 중심지로서, 휴식 뿐 아니라 학문과 교육을 담당하던 비교적 공개된 장소였다.

주합루 일원의 규장각과 서향각(書香閣) 등은 왕실 도서관 용도였고,

영화당(暎花堂)에서는 때로 왕이 입회하는 특별한 과거시험이 치러지기도 했다.

개인적 휴식을 위한 부용정(芙蓉亭)은 연못에 발을 담그고, 행사를 위한 영화당은 연못에 면해 있으며, 학문을 연마하던 주합루는 높은 곳에서 내려다보고 있다. 하나하나의 건물들도 각각 특색이 있고 아름답지만, 서로 어우러지면서 서로에게 풍경이 되는 절묘한 경관을 이룬다. - 안내문에서 -

 

 


영화당

 

 


해시계 - 앙부일구(영화당 옆에 위치)

 

 


사정기비각(四井記碑閣)

 


애련지와 애련정


 


금마문을 들어서면 왼쪽으로 의두합(倚斗閤)이 보입니다.

  

 


애련지(愛蓮池)와 의두합(倚斗閤)

연못 북쪽 끝에 걸쳐있는 애련정(愛蓮亭)이 있다.

연꽃을 특히 좋아했던 숙종이 이 정자에 애련(愛蓮)이라는 이름을 붙여, 연못은 애련지(愛蓮池)가 되었다. 숙종은 ‘내가 연꽃을 사랑함은 더러운 곳에 처하여도 맑고 깨끗하여 은연히 군자의 덕을 지녔기 때문이다’라고 정자의 이름을 지은 까닭을 밝혔다.

순조의 맏아들인 효명세자(1809년~1830년)는 총명하고 인품이 높아 18세에 순조를 대리하여 정치를 지휘하다 22세로 요절한 왕자였다.

효명세자는 1827년부터 여러 시설물을 세워 새로운 정원을 만들고 학문을 연마하며 정치를 구상했다. 현재 “기오헌(奇傲軒)”이라는 현판이 붙은 8칸의 의두합(倚斗閤)은 서재로써 그가 공부방으로 사용하였으며 단청을 하지 않아 단출하고 소박하며, 또한 독서와 사색을 위하여 궁궐 내 유일한 북향 건물로 되어 있다.

단칸의 애련정(愛蓮亭) 역시 작지만 애련지(愛蓮池) 연못에 반쯤 걸친 모습은 경쾌하며 정자 안에서 내다보는 풍경은 절경을 이룬다.


 


운경거(韻磬居) 추정건물

운경거(韻磬居)로 추정되는 궐 안에서 가장 작은 한 칸 반짜리 건물.

 

 


불로문(不老門)

이 문을 하루에 한 번씩만 통과하면 영원히 늙지 않을까요?

 

 


관람정 


 

 


존덕정과 폄우사

존덕정 부근은 후원 안에서 가장 늦게 지금의 모습을 갖춘 곳이며, 연지는 원래 두 네모꼴과 둥근 한 개의 연못으로 나누어졌다가 일제강점기에 하나의 곡선형으로 바뀌었다.

연못 주변에 육각 겹지붕 정자인 존덕정(尊德亭), 부채꼴 모양의 관람정(觀覽亭), 길쭉한 맞배지붕을 가진 폄우사(砭愚榭) 등 다양한 형태의 정자들을 세웠다.

관람정 맞은 편 언덕에는 단칸의 사모지붕을 가진 승재정(勝在亭)이 날아갈 듯 앉아 있다.

1644년 건립된 존덕정이 가장 오래된 건물이며, 관람정과 승재정은 1830년대 이후에 세워졌다.



존덕정과 정조의 교시

존덕정 안 북쪽 벽에 “萬川明月主人翁自序(만천명월주인옹자서)”라는

제목으로 빽빽하게 쓴 현판이 걸려 있는데 정조가 집권 말기인 1798년에 직접 지은 글이다.

“세상의 모든 시내는 달을 품고 있지만 하늘에 떠 있는 달은 유일하니 그 달은 곧 임금인 나이고 시내는 곧 너희 신하들이다. 따라서 시내가 달을 따르는 것이 우주의 이치“라는 강력한 내용이다. 평생 왕권 강화를 위해 노력했던 정조의 준엄한 꾸짖음을 듣는 듯하다.

천장 중앙에는 쌍룡이 여의주를 희롱하는 그림을 그렸는데 이 역시 왕권의 지엄함을 상징하는 것이다. - 안내문에서 - 

 


관람정


 



  

 


승재정

 

 


관람정 맞은 편 언덕에는 단칸의 사모지붕을 가진 승재정(勝在亭)이 날아갈 듯 앉아 있다.

1644년 건립된 존덕정이 가장 오래된 건물이며, 관람정과 승재정은 1830년대 이후에 세워졌다. 

 

 


폄우사(砭愚榭)

 

 


옥잠화

 

 


존덕정 옆의 은행나무 

 



 

 

 



  

 


 

  



 


청의정

 

 


   

옥류천(玉流川) 일원

후원 북쪽 깊은 골짜기에 흐르는 시내를 옥류천(玉流川)이라 한다.

1636년, 거대한 바위인 소요암(逍遙巖)을 다듬어 그 위에 홈을 파서 휘도는 물길을 끌어들였고 작은 폭포로 떨어져 옥류천이 시작된다. 때로 흐르는 물 위에 술잔을 띄우고 시를 짓는 유상곡수연(流觴曲水宴)이 이곳에서 벌어지기도 했다.

바위에 새겨진 “玉流川” 세 글자는 인조의 친필이고, 오언절구 시(詩)는 일대의 경치를 읊은 숙종의 작품이다. 소요정(逍遙亭), 태극정(太極亭), 농산정(籠山亭), 취한정(翠寒亭) 등 간략한 규모의 정자를 곳곳에 세워 매우 은밀한 정원을 이루었다. 작은 논을 끼고 있는 청의정(淸漪亭)은 볏짚으로 지붕을 덮은 궁궐 내의 유일한 초가집이다.  

 

 

옥류천과 주변 정자들

창덕궁 후원의 가장 북쪽 깊숙한 곳에 널찍한 바위와 폭포와 정자들이 어우러져 한 폭의 선경(仙境)을 연출하는 곳이 옥류천 일대다. 존덕정의 북쪽에 위치한 옥류천 주변을 본격적으로 조성한 왕은 인조다. 옥류천의 계류(溪流)는 북악에서 동쪽으로 뻗어 내려오다가 응봉 기슭으로부터 흐르는 물과 인조가 친히 파서 일군 어정(御井)에서 넘치는 물이 합쳐 흐르는 시내이다. 태극정(太極亭), 취규정(聚奎亭) 등 옥류천 일대의 정자들도 인조 때 대부분 조성되었다. 인조는 옥류천의 널따란 큰 바위인 소요암(逍遙巖)에 어필로 ‘玉流川(옥류천)’이라는 세 글자를 새겨 넣었다. 이 글씨는 규장각한국학연구원에 소장된 [열성어필(列聖御筆)]에 인조의 글씨로도 남아 있다. 1636년(인조 14년) 가을에는 옥류천의 바닥돌을 조금 깎아 계곡물이 흘러 들어오게 만들고, 물이 암반을 둥글게 휘돌아 흘러서 소요정(逍遙亭) 앞에서 폭포가 되어 떨어지게 했다. 그 모습은 마치 경주 포석정의 곡수(曲水)를 연상시킨다.


옥류천의 비경은 왕들의 시심(詩心)을 불러일으키기도 했는데, 가장 대표적인 것이 숙종의 어제시(御製詩)이다.


날으듯이 삼백척을 흘러 [飛流三百尺]

멀리 하늘에서 떨어진다 [遙落九天來]

보고 있으니 흰 무지개 일어나 [看是白虹起]

온 골짜기에 천둥 번개를 친다 [飜成萬壑雷]

1820년대에 그린 [동궐도]에도 옥류천의 바위에 새긴 숙종의 시가 미세하게 표현되어 있는 것이 흥미롭다.   -안내문에서-




  

 


태정문 


 

 


장수를 기원하는 두꺼비 상(像)을 조각해 놓은 석물(石物) 


 

 


청설모가 어떻게 내려갈까? 궁리 중...

 

 



  

 




창덕궁 내에 있는 장락문(長樂門)이 후원에도 있군요... 대단한 발견 ㅎ ㅎ ㅎ

장락문은 연경당으로들어가는 문입니다.

 

 


장양문은 사랑채로 출입하는 남자들의 전용문입니다.

  

 


연경당(演慶堂)

효명세자는 아버지인 순조에게 진작례(進爵禮)를 올리기 위해 1828년에 연경당(演慶堂)을 건립했는데, 원래 모습은 지금과 상당히 달랐다. 진작례(進爵禮)란 신하들이 왕과 왕비에게 술과 음식을 올리는 행사로소 효명세자는 이를 왕권강화책으로 이용했다. 현재의 연경당은 1865년 고종이 새롭게 건립했다. 사대부 살림집을 본떠 왕의 사랑채와 왕비의 안채를 중심으로 이루어졌다.

서재인 선향재(善香齋)는 중국풍의 벽체와 서양풍 차양을 설치했다. 뒷마당 모퉁이 높은 곳의 농수정(濃繡亭)은 마치 매가 날개를 편 것같이 날렵한 모습이다.  


 

 



  

 


청수정사(淸水精舍)는 연경당의 동쪽 행각으로 ‘맑은 물이 두르고 있는 정사’라는 뜻이다. 


 

 



  

 


선향재(善香齋)는 연경당 동쪽에 책들을 보관하고 책을 읽는 서재로 ‘좋은 향기가 서린 집’이라는 뜻이다.  

 


 

서재인 선향재(善香齋)는 중국풍의 벽체와 서양풍 차양을 설치했다. 

  



  

 



  

 


농수정(濃繡亭)

연경당(演慶堂) 뒷마당 모퉁이 높은 곳의 농수정(濃繡亭)은 마치 매가 날개를 편 것같이 날렵한 모습이다. 

 

 



 

 

언제나 행복하고 건강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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