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경

창덕궁 [1]편

로제로제 2014. 8. 25. 23:01

창덕궁 [1]편



돈화문(敦化門)

 창덕궁의 정문(正門)이며 보물 제383호로 정면 5칸, 측면 2칸의 중층 건물이다. 창경궁의 정문인 홍화문과 함께 조선 중기에 세워진 창덕궁의 정문으로 중요시된다. 1412년(태종 12년)에 창건되었으며 임진왜란 때 소실되었다가 1608년(광해군 즉위년)에 창덕궁이 복구되면서 문도 함께 세워졌다. 현재의 건물은 이때 세워진 것이다.

돈화문은 처음에는 규모가 크지 않았다가 차츰 현재와 같은 큰 규모로 개조한 것으로 보이는데, 1451년(문종 1)에 돈화문을 고치라는 왕명이 있었으며 1506년(연산군 12)에는 돈화문을 높고 크게 개조하라는 왕명이 있었다. 이것은 처음 별궁으로 창건되었던 창덕궁이 차츰 본궁의 구실을 하게 되어, 외국의 사절이 이 궁의 정전(正殿)에서 왕을 배알하거나 국상(國喪)이 있을 때 상여가 나가게 되는 등 궁의 정문을 보다 위엄 있고 크게 만들 필요가 있었기 때문으로 풀이된다.

돈화문은 그 위치가 궁의 서남쪽 모퉁이에 치우쳐 있는데, 이는 궁의 지형이 동서로 길게 평지가 마련되고 후방과 전방 동쪽에 언덕이 있어 이 지형에 맞추어 건물을 배치한 데에 연유한 것으로 보인다.

이에 따라 궁의 정문과 정전은 일직선상에 놓이지 않고 정문의 동북쪽에 정전이 놓였다. 이것은 경복궁이나 창경궁의 정문이 정전과 일직선상의 위치에 있는 것과 대조된다.

이 건물은 서울 숭례문, 창경궁 홍화문과 함께 조선시대 대규모 문의 건축양식을 살펴볼 수 있는 중요한 유적이다.

- 안내문에서 -

 

   

 

  창덕궁(昌德宮)

창덕궁(昌德宮)은 조선조 3대 임금인 태종(太宗)이 즉위한 후 1404년(태종 4년)에 이궁(離宮)을 짓기 시작하여 이듬해인 1405년에 완공하고 창덕궁이라 명명하였다. 그 후 계속 인정전(仁政殿)· 선정전(宣政殿) 등 많은 전당을 건립하고, 1412년 돈화문(敦化門)을 건립하여 궁궐의 면모를 갖추었다.

이 궁전은 1592년(선조 25년) 임진왜란 때 소실되었는데, 1607년(선조 40년)에 그 복구가 시작되어 1610년(광해군 2년)에 중건이 거의 끝났으나, 1623년 3월에 인정전을 제외한 대부분의 전각이 실화(失火)로 불탔다가 1647년(인조 25년)에야 그 복구가 완료되었다. 그 후에도 크고 작은 화재가 여러 차례 있었는데, 특히 1917년 대조전(大造殿)을 중심으로 내전 일곽이 소실되어 그 복구를 위하여 경복궁 내의 교태전(交泰殿)을 비롯한 강녕전 동·서 행각 등의 많은 건물이 해체 전용되었다.

창덕궁은 많은 재앙을 입으면서도 여러 건물이 비교적 잘 보존되어 왔는데, 1912년부터는 후원인 금원(禁苑)과 아울러 인정전을 관람할 수 있게 하였고, 8·15광복 후에도 창덕궁과 금원을 공개하고 있다. 창덕궁은 금원을 비롯하여 다른 부속건물이 비교적 원형으로 남아 있어 가장 중요한 고궁 중의 하나이다.

1963년 1월 18일 사적 제122호로 지정되었고 1997년 12월 6일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록되었다.

-안내문에서 -

 

 


  

 


 

  

금천교(錦川橋)

창덕궁의 정문인 돈화문을 들어서서 오른쪽의 금천은 북쪽에서 남쪽으로 흘러 돈화문 동쪽 궐 밖으로 빠져나간다.

1411년(태종 11년) 금천에 다리를 놓았는데, 비단처럼 아름다운 물이 흐르는 개울에 놓인 다리라는 뜻으로 “금천교(錦川橋)”라 불렀고 현재 궁궐에 남아있는 가장 오래된 돌다리로서 2012년 보물 제1762호로 지정되었다. -안내문에서 - 


금천교를 지나...




 진선문(進善門)을 지나면...

 

 

인정전(仁政殿)으로 통하는 인정문(仁政門)입니다.

인정전(仁政殿)의 “인정(仁政)”은 “어진 정치”라는 뜻이겠지요?

  



  

오랜 세월이 지나면서 돌계단에 새긴 문양도 점점 닳아 없어지네요.

 

 

 

“드므”

“드므”에 대한 설명은 덕수궁 편에서 이미 자세하게 설명했으므로 생략 !  

 

임금님이 앉으시던 높은 용상(龍床) 


 

창덕궁의 문살은 아름답기로 유명하며 20여 가지의 종류가 있다고 하네요. - 문화해설사님이 설명해 주셔서... - 


 


  

 


  


선정전(宣政殿) 내부

창덕궁의 편전(便殿)이며 조선시대의 국왕이 평상시에 거처하며 신하들과 국사를 의논하고 행하던 곳이다. 창덕궁이 건립되던 초기에는 조계청이라고 불렀다가 세조 즉위 7년인 1461년에 선정전(宣政殿)으로 명칭을 바꾸었다. 중종의 계비이자 명종의 어머니인 문정왕후가 선정전에서 수렴청정(垂簾聽政)을 했던 건물이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화재로 전소되었고 1647년 인조 때 중건되었다. 조선 후기에 희정당이 편전으로 이용되면서 별로 활용되지 못하였다. 건물은 행각으로 둘러싸여있고 동쪽은 담장이다. 정면으로는 어로(御路)인 복도가 설치되어 있다.

현존하는 궁궐의 전각 중에 유일하게 남은 청기와 건물이다. 보물 제814호. -안내문에서 - 

  

 


  

 

자물통을 열고 들어가 보고 싶지만... 열쇠가 없어서 통과!


  


  

대조전(大造殿)

보물 제816호. 정면 9칸, 측면 4칸의 팔작지붕. 침전 여섯 중에 으뜸은 왕비의 침소인 곤전(坤殿)이다. 곤전은 중궁전(中宮殿)이라고도 하며 임금의 정침 바로 뒤에 위치하여 중심 되는 자리를 차지한다. 궁내의 다른 전각엔 용마루가 있으나 왕비의 처소에는 용마루가 없다.

임진왜란 때 등 여러 차례 대화재로 소실되었으며, 현존하는 건물은 1920년에 경복궁의 내전인 교태전(交泰殿)을 옮겨 지은 것이다. - 안내문에서 - 


  

흥복헌(興福軒)

창덕궁 중궁전 즉 왕비의 침전인 대조전(大造殿) 동쪽에 딸려 있는 전각이다. 1917년 창덕궁 내전 일대에 큰 불이 나자 일제는 이를 복구한다는 핑계로 교태전을 비롯한 경복궁의 내전 건물을 모두 뜯어내 그 목재로 창덕궁의 대조전· 희정당· 흥복헌 등을 재건하였다. 흥복헌은 1910년 8월 22일 국권을 일제에 이양하는 내용으로 을사늑약(한일합병조약)이 체결된 대한제국의 마지막 어전회의가 열린 곳이며, 1926년 4월 25일 순종이 운명한 장소이다. -안내문에서 -



1910년 8월 22일 오후 1시. 일체의 출입이 통제된 채 창덕궁 흥복헌에서는 조선왕조의 마지막 어전회의가 열린다. 비운의 마지막 황제 순종이 주재하는 어전회의에는 내각의 총리대신 이완용, 내부대신 박제순, 농상공부대신 조중응, 법무대신 이제곤 등의 각료와 시종무관 등이 참석하여 일사천리로 진행된다.

일본의 강압에 의해 사전에 조율된 어전회의의 토의 안건은 “한일합병조약안”의 최종 승인과 이를 실행토록 내각에 위임하는 회의였다.

한일합병조약(을사늑약)의 내용은

“1. 한국 황제는 한국 전체에 관한 일체의 통치권을 완전히 또 영구히 일본 황제에게 넘긴다.

2. 일본 황제는 이를 수락하고 한국을 일본에 병합하는 것을 승락한다”는 내용이다.

한 나라의 운명이 끝나는 마지막 어전회의는 약 한 시간 만에 끝났으며 마침내 순종황제는 이완용 총리대신에게 한일병합협약 체결 전권위임장을 내린다.

이러한 마지막 어전회의를 흥복헌 입구 병풍 뒤에서 숨죽이고 지켜보던 순종의 왕비 순정효황후는 총리대신 이완용에게 넘겨주어야 할 옥새를 치마폭에 감추고 내주지 않으려 안간힘을 쓰다가 삼촌인 윤덕영(尹德榮)에게 이를 빼앗기고 통곡을 하는 상황에서 어전회의는 끝난다.

순종의 옥새와 전권위임장을 받아 들고 흥복헌을 나온 이완용은 창덕궁 돈화문을 나와 일본통감 만이 건너다닐 수 있다는 청계천 관수교(일제의 조선통감부에서 통감 전용다리로 가설하였음)를 건너 남산 예장동에 위치한 조선통감 관저로 달려간다.

대한제국 내각총리대신 이완용과 일제의 조선통감 데라우치 마사다케(寺內正毅)가 “한일합병조약”에 서명 날인하여 체결이 이루어지고, 이로부터 1주일 후인 1910년 8월 29일 한일합방이 공식 선포되어 대한제국은 일본제국에 복속되어 조선왕조 519년이 종말을 고하게 된다.

대한제국의 비운의 마지막 황제 순종은 1926년 4월, 이곳 망국의 공간인 흥복전에서 세상을 하직한다. - 박성일의 역사탐방에서 부분발췌 -


  


 

 

해시계 - 앙부일구


  

창덕궁은 자연적인 지형을 최대한 살려서 지은 건축물이라서 담장도 지형에 따라 아름다운 형태가 되었네요. 

 


 

  


  

 

아름다운 굴뚝

 

  

 

아궁이에 단 철제문은 훨씬 후대에 만들어 달았겠지요...


  

흐르는 세월은 무상하여 우물물도 다 말랐구나!

 

 


 


 



 


 

 


 

 

 

장락문(長樂門)

흥선대원군이 현판을 쓴 장락문(長樂門)이 낙선재의 정문 역할을 한다.

장락문에서 앞쪽을 바라보면 넓은 마당 안에 낙선재가 자리하고, 위쪽으로 아름다운 정자인 상량정(上凉亭)이 서 있다.


  

 

낙선재(樂善齋)

낙선재(樂善齋)와 석복헌(錫福軒)ㆍ수강재(壽康齋) 등으로 구성된 낙선재 일대는 창덕궁과 창경궁의 경계에 위치하고 있다. 낙선재는 헌종이 한창 왕권강화를 시도하던 시기인 1847년(헌종 13년)에 왕실의 권위를 확립하고 개혁의지를 실천하기 위해 지었다. 후궁인 경빈 김씨와 대왕대비 순원왕후와도 관련이 깊은 공간이었다. 이 건물은 조선시대에는 창경궁 영역에 속해 있었는데, 지금은 창덕궁에서 관리를 맡고 있어 창덕궁으로 입장해야 볼 수 있다. 단청을 칠하지 않아 사대부가의 건물과 유사해 보인다. 근현대에 들어와서는 마지막 황비 순정효황후, 황태자비 이방자 여사, 고종 황제의 외동딸 덕혜옹주 등 황실의 마지막 여인들이 여생을 보낸 곳으로도 잘 알려져 있다. - 안내문에서 -

 


 

  

 


  

 

수강재(壽康齋)

정조 9년(1785년)에 지었으며, 단종이 머물렀던 옛 수강궁(壽康宮) 자리에 세워 수강재(壽康齋)라 이름 붙였다. 순조 27년(1827년)부터 대리청정을 했던 효명세자(익종)의 별당이었으며, 헌종 14년(1848년)에 헌종의 할머니였던 순원왕후의 거처로 중수하였다. 조선의 마지막 옹주인 덕혜옹주가 1989년 77살의 나이로 숨을 거둘 때까지 거처했던 곳이며, 장례식도 이곳에서 치러졌다. 수강재는 낙선재· 석복헌과 담장을 사이에 두고 있으며 낙선재 일대의 복원작업 후 2006년부터 공개되었다.



 

 

수강재에는 마지막 황실 가족인 덕혜옹주(1912~1989)가 머물렀다. 덕혜옹주는 고종이 환갑에 얻은 아주 귀한 딸이었다. 그녀는 조선의 마지막 황녀로 귀하게 자랐으나, 안타깝게도 1925년 일제에 의하여 볼모로 끌려가고 말았다. 이후 대마도 번주(藩主)의 아들인 소다케시(宗武志)와 강제 결혼하여 딸[宗正惠]을 낳았는데, 정신분열증으로 도쿄 인근의 병원에서 지내다가 1962년 귀국하여 이곳에 머물렀다. 덕혜옹주가 귀국한 이듬해에 이방자(李方子:1901~1989) 여사도 귀국해 낙선재에서 여생을 보냈다. 이방자 여사는 영친왕 이은(李垠)의 부인으로 마지막 황태자비였다. 이방자 여사와 덕혜옹주는 각각 낙선재와 수강재에 머물면서, 서로 의지하며 지냈다. 그러다 1989년 4월 21일 덕혜옹주가 병세를 이기지 못하고 낙선재에서 세상을 떠났다. 함께 생활하던 덕혜옹주가 떠나서일까? 열흘 사이로 4월 30일에 이방자 여사도 눈을 감았다.

귀국 후에도 지병으로 많은 고생을 한 덕혜옹주. 그녀가 정신이 맑을 때 썼다는 낙서 한 장은 낙선재에 대한 그리움과 함께 조선황실의 마지막 모습을 잘 대변해 주고 있다.

 

“나는 낙선재에서 오래오래 살고 싶어요

전하 비전하 보고 싶습니다

대한민국 우리나라”

  

 

 

문살의 문양이 보는 각도에 따라 다 다르게 보인다고 합니다.



 


하마석(下馬石)

노둣돌이라고도 하는데, 이 돌은 말이나 가마를 타고 내릴 때 딛는 돌입니다.

 

매화벽화

문과 문 사이의 벽에도 단순한 회벽을 한 것이 아니고 사군자(四君子)의 하나인 매화를 돋을새김으로 장식해서 아름다움을 더해주고 있습니다.

<주의: 이 매화 벽화사진은 함부로 다른 곳에 옮기시면 안 됩니다.>



 

 

기품 있는 아름다움, 낙선재 후원의 한정당(閒靜堂)



 

 

굴뚝의 아름다움!



 

 

금사연지(琴史硯池)

물을 담아두던 확.

확은 원래 “돌로 만든 절구”를 뜻하는 말이지만, 요즘으로 치자면 방화수(防火水)를 담아두던 아주 중요한 용도의 석물(石物)입니다.

금(琴)은 거문고 금을 뜻하고 사(史)는 사기 사, 역사 사를 뜻하며,

硯池(연지)는 벼루 앞쪽에 물을 부어 괴게 되어 있고 먹물이 담기는 오목한 부분(部分)을 말합니다.



 

 

굴뚝의 아름다움!



 

 

낙선재의 어느 방 내부모습


  

소중한 문화재를 아끼고 사랑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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