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화 전등사
호국도량 지장성지 전등사(傳燈寺)
단군왕검의 세 왕자가 쌓았다는 정족산 삼랑성(鼎足山 三郞城)(사적130호)내에 위치한 전등사(傳燈寺)는 고구려 소수림왕 11년(서기381년)에 아도화상(阿道和尙)이 진종사(眞宗寺)로 창건하였다고 한다.
전등사(傳燈寺)라는 이름이 붙게 된 연유에 대해 몇 가지 서로 다른 설(說)이 있으나, 그 중에 하나는...
지금의 전등사(傳燈寺)라는 명칭은 고려 충렬왕 8년(1282년)에 충렬왕의 비인 정화궁주(貞和宮主)가 승려 인기(印奇)에게 부탁하여 송(宋)나라의 대장경을 가져와 이 절에 두게 하고 옥등잔(玉燈盞)을 부처님께 바친 데서 전등사라 개칭하였다고 한다.
정화궁주(貞和宮主)는 고려 25대 왕인 충렬왕이 태자로 있을 때 정비(正妃)로 맞이한 여인이다.
그러나 충렬왕은 원(元)나라에 가 있는 동안 강요에 의해 원나라 세조의 딸인 제국공주와 다시 결혼한다.
당시 고려는 원나라의 속국이었다.
충렬왕을 사이에 두고 정화궁주와 제국공주는 반목하게 된다.
뒷날 정화궁주는 충렬왕의 사랑을 잃고 저주를 보내고 있다는 투서 때문에 감금되기도 한다.
사랑을 잃은 여인의 아픔을 안고 외롭게 지낸다.
살아서 다시는 충렬왕과 만나지 못한 정화궁주는 전등사에 와서 아픈 마음을 달래며 고려의 국운이 다시 강건해지기를 기원한다.
강화 삼랑성(江華 三郞城) (정족산성-鼎足山城이라고도 함) 동문(東門) 입구
양헌수(梁憲洙) 승전비(勝戰碑)
1866년(고종 3년) 조불전쟁(병인양요) 때 열악한 병기로 우세한 프랑스군과 싸워 정족산성 전투를 승리로 이끈 조선말기의 양헌수 장군의 전적을 기록한 비.
윤장대(輪藏臺)
보통 팔각형으로 되어 있는 윤장대는 팽이처럼 돌릴 수 있게 되어 있으며, 내부에는 불경을 넣어둔다.
이것을 한 번 돌리면 불경을 한 번 읽은 것과 같은 의미이다.
윤장대는 글자를 모르거나 불경을 읽을 시간이 없는 신도들을 위하여 만들어진 불구로, 중국 양(梁)나라의 선혜대사가 처음 만들었다고 알려져 있다.
보호수
수종: 은행나무
수령: 600년
높이: 25m
둘레: 5m
전등사 은행나무 전설
은행 나무는 암컷과 수컷이 서로 마주보고 있어야 열매를 맺는다.
그런데 전등사 은행나무는 꽃은 피어도 열매가 맺지 않는다고 한다.
이 신기한 나무들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은 전설이 있다.
강화도령 철종 임금 때의 일이다.
조정에서는 전등사에 은행을 스무 가마나 바치라고 요구했다.
전등사 은행나무는 기껏해야 열 가마밖에 열매를 맺지 않는데 스무 가마를 요구하는 관리들의 횡포가 이만저만 심한 게 아니었다.
이 지시를 듣게 된 동승이 노스님께 고했다.
"스님, 정말 관가에서 너무들 하는 거 아닙니까요?"
"허허, 참으로 난감한 일이다. 얘야, 그렇다고 그 사람들을 미워해선 안 되느니라.
참아야 하느니..."
노스님은 이렇게 타일렀지만 자신도 깊은 고민에 빠졌다.
노스님은 하는 수 없이 백련사에 있는 추송 스님에게 도움을 청하기로 했다.
추송 스님은 도력이 높기로 소문이 나신 분이었다.
며칠 후 추송 스님이 전등사에 나타났다.
보호수
수종: 은행나무
수령: 507년
높이: 23m
둘레: 4m
지정일자: 2001. 8. 6
곧 일대에 전등사 은행나무에서 두 배나 더 열리게 하는 기도가 있을 것이라는 소문이 퍼졌다.
사람들이 구름처럼 몰려들어 추송 스님의 3일 기도를 지켜보았다.
그중에는 관리들도 섞여 있었다.
"어떻게 은행이 두 배나 많이 열린단 말인가?"
"맞아! 추송 스님이 제 아무리 정성을 드려도 소용없는 일이겠지."
사람들은 저마다 이렇게 수군거렸다.
이윽고 기도가 끝나는 날이었다.
갑자기 추송 스님의 기도를 지켜보던 관리들의 눈이 얻어맞은 것처럼 퉁퉁 부어버렸다.
"이제 두 그루의 나무에서는 더 이상 은행이 열리지 않을 것이요."
추송 스님이 기도를 끝내고 사람들에게 말했다.
사람들은 저마다 어리둥절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바로 그때, 때 아닌 먹구름이 전등사를 뒤덮더니 비가 무섭게 내렸다.
사람들은 두려움에 떨며 일제히 땅에 엎드렸다.
얼마 후 사람들이 고개를 들었을 땐 추송 스님은 물론 노스님과 동승까지 모두 사라졌다.
사람들은 보살이 전등사를 구하기 위해 세 명의 스님으로 변해 왔다고 믿게 되었다.
그때부터 전등사 은행나무는 열매를 맺지 않는다고 합니다.
강화 정족산 전등사
전등사의 입구인 대조루(對潮樓) - 정면에서 바라본 모습
전등사의 입구인 대조루(對潮樓) - 들어와서 본 모습
(인천광역시 문화재자료 제7호 지정일: 1995년 3월 1일)
전등사를 둘러싸고 있는 염하(강화해협)와 아침 저녁으로 뜨고 지는 해를 바라볼 수 있는 누각이 대조루(對潮樓)이다.
조선 영조 25년(1749년)에 건물을 중수했고 1841년과 1932년에 중건한 것으로 보인다.
대웅전 쪽에서 보면 1층이지만 산 아래에서 올라가며 바라보면 2층인 건물이다.
1726년에 영조(英祖) 임금이 이 곳에 와서 직접 썼다는 "취향당" 현판은 대조루 안에 보관하고 있다고 한다.
전등사는 다른 사찰과는 달리 사천왕문(四天王門)이나 사천왕상(四天王像)이 없습니다.
강화 전등사 대웅보전 (江華 傳燈寺 大雄寶殿)
지정번호: 보물 제178호
지정일: 1963년 01월 21일
시대: 조선
1621년(광해군 13년)에 중건한 것으로 정면 3칸, 측면 3칸의 단층 팔작(八作)지붕이다.
1916년 수리할 때 발견된 《양간록(樑間錄)》에는 1605년(선조 38년) 불에 타버리고 1614년에 다시 불이 나 전소된 것을, 1615년에 개축하기 시작하여 1621년에 완성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조선 중기 건축물로서는 으뜸이며 특히 내부의 불단 위에 꾸며진 닫집의 화려한 아름다움은 건축공예의 극치를 이루고 있다.
전등사 대웅보전 (傳燈寺 大雄寶殿) 내의 목조 석가여래 삼존불 - 보물 제1785호 (지정일: 2012년 12월 27일)
제작시기: 1623년 경
전등사 업경대(業鏡臺) - 인천광역시 유형문화재 제47호(지정일: 2002.12.23)
전등사 대웅보전 목조 석가여래 삼존불상 좌우의 업경대(業鏡臺)는 조선 인조 5년(1627년)에 제작되었고 죽은 자의 죄업(罪業)을 비춰준다고 하는 거울이며 업경륜이라고도 합니다.
전등사 대웅보전 천장장식과 닫집
전등사 대웅보전 내부에는 장식적인 면이 많이 발휘되었으며 대들보에 걸쳐 있는 충량(衝樑) 끝은 용머리(龍頭)로 만들어져 있고, 또 화려하게 채색한 천장 주위에는 온통 극락조와 연꽃 등의 조각으로 장식되어 있다.
불단 위의 닫집은 처마를 정자각(丁字閣) 모양으로 꾸미고 16포(包)나 되는 공포를 중첩해서 배열하고 있으며, 그 아래에는 부룡(浮龍) · 극락조 등을 매달아놓았다.
카메라 모델: FUJI XQ1
F-스톱: F/1.8
노출 시간: 1/70초
ISO: ISO-1000
플래시: 끔
삼각대: 사용 무(無)
보정여부: 무(無)보정
전등사 대웅보전 내부의 신중탱화
신미양요와 병인양요 때에 강화도를 지키며 무운을 기원했던 것으로 보이는 사람들의 이름이 적혀 있는 대웅보전 내의 기둥
전등사 대웅보전 처마 네 귀퉁이를 손으로 떠받들고 있는 조각상
대웅보전 처마 네 귀퉁이를 손으로 떠받치고 있는 나체의 조각상은 제각기 다른 모습입니다.
강화 전등사 대웅보전 처마 네 귀퉁이에는 "나녀상(裸女像)" 또는 "나부상(裸婦像)"이라고도 부르는 특이한 조각상과 함께 재미있는 전설이 전해 오고 있습니다.
절의 중건에 참여하게 된 도편수는 공사를 하며 절 아랫마을에 사는 주모와 사랑에 빠져 공사가 끝나면 함께 살기로 약속을 하였습니다.
도편수는 공사를 하며 번 돈을 모두 주모에게 맡기고 서둘러 공사를 끝내기 위해 밤낮없이 일했는데 공사가 끝날 무렵 주막에 가보니 주모는 도편수가 준 돈을 모두 챙겨 도망을 간 후였습니다.
이 사실을 알게 된 도편수는 한동안 넋을 잃고 지내다가 다시 마음을 다잡고 대웅보전 공사를 마무리하였습니다.
자신을 배신한 여인이 불경소리를 들으며 마음을 고쳐 착하게 살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처마에 '나녀상'을 만들었다는 이야기와 눈이 오나 비가 오나 무거운 추녀 네 귀퉁이를 떠받치며 벌을 받으라는 의미에서 '나녀상'을 만들었다고 하는 전설입니다.
그런데 추녀 4곳 중 2곳의 조각상은 두 손이 아닌 한 손으로 떠받들고 있는 것이 특이합니다.
꾀를 부리는 듯한 모습으로 선조들의 재치와 익살이 돋보입니다.
한편으로는 나부상(裸婦像)이 아니라, 원숭이 상(像)으로 보는 견해도 있으나 아직까지는 도편수의 순정을 배반한 주모로 보는 것이 지배적이라고 합니다.
전등사 종루(鐘樓)
종루(鐘樓) - 북(鼓), 종(鐘), 운판(雲版), 목어(木魚)의 사물(四物)을 걸어둔 곳입니다.
북은 땅 위의 중생을,
종은 지옥의 중생을,
운판은 하늘의 중생을,
목어는 물속의 중생을
제도하기 위하여 울린다고 합니다.
전등사 강설당(講說堂)
전등사 강설당(講說堂)은 스님들이 경전 공부를 하던 곳인데 병영지로 사용된 적도 있습니다.
1866년 병인양요 때는 이곳에서 강계포수 800명이 취사하였다고 하며 현재는 전등사 불교대학과정 건물로 사용하고 있다고 합니다.
전등사 경내의 쉼터
전등사 공양간과 장독대 주변
향로전(香爐殿)
향로전(香爐殿)은 원래 불공용 제물의 저장고였으며 조선시대에는 상궁이나 나인들이 기도하기 위해 머물던 곳으로 쓰이기도 했다고 합니다.
전등사 약사전(藥師殿) - 보물 제179호 (지정일: 1963.01.21)과 그 내부 모습
약사여래불을 모신 전각입니다.
전등사 경내 풍경
전등사 명부전(冥府殿)
전등사 명부전 내부모습
강화 전등사 명부전 목조지장보살삼존상 및 시왕상 일괄
- 보물 제1786호 (지정일: 2012년 12월 27일)
이름은...??? 새 박사 윤무부 교수님께 물어볼까요?
오,그대 이름은 "딱새" 랍니다.
으랏차차, 윤무수 교수님은 안 오셔도 되겠어요...
대비마마님, 짜앙 ~ 입니다요 ^^ 고마워요, 마마님! ^^
전등사 경내 풍경
전등사 범종(梵鐘) - 보물 제393호 (지정일: 1963.09.02)
이 범종은 중국 북송의 철종 소송 4년(1097년 고려 숙종2년)에 회주 수무현 백암산 숭명사에서 주조된 철제 종이다.
일제가 세계 제2차 대전 때 약탈하여 부평 병기창에 놓아두었던 것을 광복 후 독실한 불교신자에 의해 다시 전등사에 보관되어 현재에 이른 종이다.
우리나라에서 중국의 철제 종이 보물로 지정된 유일한 종으로 중국제 철종 연구에 귀중한 자료이다.
전체적인 형태는 개성 연복사 동종과 유사하나 형태와 조각수법에서 중국종의 형태로 한국의 종과는 약간의 차이를 보이고 있다.
종 꼭대기에는 두 마리의 용이 서로 등지고 웅크려서 종의 고리를 이루고 있고, 소리의 울림을 돕는 음통은 없다.
몸통 위 부분에는 8괘를 돌려가며 나열하고, 그 밑으로 종을 크게 두 부분으로 나누어 각각 8개의 정사각형을 돌렸다.
이 정사각형사이에는 명문을 새겼는데, 이 명문으로 중국 하남성 백암산 숭명사의 종이라는 것과 주조시기를 알 수 있다.
이 날 마침 문화재청 관계관과 전문가로 보이는 분들 10여명이 와서 종의 상태를 조사. 확인하고 있었습니다.
전등사 범종 (부분)
지장보살입상 같은데...
어떤 이는 일본 불상을 닮은 정도가 아니라, 아예 일본 불상이라고 하더군요.
전등사 삼성각(三聖閣)
삼성각(三聖閣)은 산신(山神), 칠성(七星), 독성(獨聖)을 함께 모신 전각입니다.
우리의 전통적인 토속 신앙을 불교적으로 받아들인 것입니다.
옛날에 혼인을 한 후 자식이 없으면 산신(山神)님께 자식을 점지해 달라고 빌었습니다.
산신(山神), 칠성(七星), 독성(獨聖)은 각각 독립된 전각에 모셔지기도 합니다.
전등사 삼성각(三聖閣) 내부 모습
극락암(極樂庵)
스님들의 수행처
지장보살상
주변에 죽은 이들을 위한 영가등이 걸려 있습니다.
정족산 사고
임진왜란 전에 실록을 보관하였던 사고는 내사고인 춘추관과 충주, 성주, 전주 등 3개의 외사고가 있었으나, 임진왜란 때 전주사고만이 화를 면하고 모두 소실되었다.
그 후 임란의 병화를 피한 전주사고본이 한양에서 가까운 강화로 옮겨져 선조 39년(1606년) 4월 복인 작업을 완료하고 전주사고본인 원본은 마니산 사고에, 나머지 4부는 춘추관, 태백산, 묘향산, 오대산사고에 각각 봉안되었다.
마니산 사고는 병자호란의 피해와 효종 4년(1653) 11월 사각의 실화사건으로 삼랑성 내 정족산 사고가 건립되어 이안 봉안되어 왔으나, 1910년 일제에 의해 국토가 강점되면서 정족산 사고본은 태백산사고의 실록 및 규장각의 도서와 함께 조선 총독부 학무과 분실에 이장되었다가 1930년 경성제국대학으로 옮겨진 후 광복과 함께 서울대학교 규장각에 보관되어 오고 있다.
정족산 사고는 1930년 전후에 파손되어 빈터에 주춧돌만 남아있던 것을 1999년 강화 문화사업으로 복원, 정비하였다.
전등사 적묵당(寂黙堂)
적묵당(寂黙堂)은 현재 스님들의 처소로 쓰이며 전등사 종무소도 함께 있습니다.
템플스테이 체험관
무설전(無說殿)과 함께 있는 갤러리 서운(瑞雲)의 내부
무설전(無說殿) 내부
무설전(無說殿)과 갤러리 서운(瑞雲)은 같은 건물입니다.
죽림다원(竹林茶園)과 인접 풍경
무설전(無說殿) 옆에 있는 죽림다원(竹林茶園)은 본디 승군(僧軍)들의 초소가 있던 자리인데 지금은 전등사를 찾는 사람들의 휴식처인 찻집(다원 茶園)으로 사용하고 있습니다.
부도탑괴 기념비
서운(瑞雲) 큰스님
전등사 부도전에는 서운(瑞雲) 큰스님을 비롯해 그 동안 전등사를 거쳐 간 스님들의 부도가 세워져 있다.
이목당(二木堂) 서운(瑞雲) 큰스님은 1903년, 경북 칠곡군에서 태어났다.
부잣집의 셋째 아들로 태어난 스님의 속명은 김한기였다.
김한기는 어려서부터 무엇 한 가지 부러울 게 없이 지냈으며, 공부 역시 마음껏 할 수 있었다.
한기 소년은 일찌감치 서울의 보성고보에 진학하여 신학문을 배웠으며, 유교경전과 노장철학에도 통달했다.
그러면서 한편으로는 불교에도 깊은 인연이 있어 각황사(지금의 조계사) 학생회에 참여하여 당시 교학의 으뜸이었던 박한영, 만해 한용운 스님 등에게 불교의 교의와 선지를 익혔다.
김한기는 서양철학은 물론 불교와 유교까지 통달하여 친구들로부터 ‘걸어 다니는 철학사전’이라는 별명을 얻을 정도였다.
그는 보성고보를 졸업할 무렵 “이제 내가 더 배워야 할 것은 부처님 경전 밖에 없다.”고 선언할 만큼 불교에 깊이 심취했다.
하지만 그는 출가를 하는 대신, 고시공부에 전념해 공직자가 되었다.
그러면서도 속인(俗人) 신분으로 파계사 성전암에서 참선 수행을 마치고 문득 한 소식을 전했다.
내가 청산(靑山)과 백운(白雲) 사이에 이르니 그림자와 실체도 없고 모양까지 없도다.
이 게송에 탄복한 제산 대선사는 그에게 ‘득장(得杖)’이라는 호를 내렸고, 쌍계사 조실이었던 설석우 대조사는 ‘백룡(白龍)’이라는 거사호를 내렸다.
뿐만 아니라 김적음 대선사와 박금봉 대선사 등도 스님의 선기(禪機)를 크게 인정했다.
그의 직위는 계속 올라 마흔일곱 살이 되던 1950년에는 ‘서울전매서장’이라는 직책을 맡게 되었다.
6·25 전쟁이 터졌을 때 그는 미처 피난을 가지 못하고 서울에 남아 있었다.
하지만 9·28 수복 후에는 ‘인민군에게 부역했다’는 엉뚱한 누명을 쓰고 헌병대로 끌려가 한 달 동안 혹독한 고문을 받았다.
결국 철저한 조사 끝에 무혐의로 석방되기는 했으나 집에 돌아와 보니 외동딸이 스물다섯 살의 나이로 죽은 뒤였다.
외동딸 혜숙은 아버지가 죄 없이 헌병대로 끌려가는 것을 보고 충격을 받아 병을 얻고 끝내 이승을 떠났던 것이다.
속세의 삶에 더 이상 미련이 없어진 그는 제산 스님을 은사로 득도(得道)를 했다.
출가하기엔 너무도 늦은 나이, 늦깎이 중의 늦깎이로 출가한 그는 상주 갑상사 등에서 피나는 정진을 거듭한다.
하지만 서운 스님에게는 많은 일들이 기다리고 있었다.
“불교정화운동이 일어났으니 속히 상경하시오.”
동산·효봉 큰스님이 서운 스님을 불러올려 종단의 중책을 맡긴 것이다.
마흔일곱 살까지 국가의 행정을 맡았던 서운 스님인지라 불교 정화운동의 회오리를 누구보다 능숙하게 처리할 수 있었다.
그 때문에 서운 스님은 늦깎이임에도 불구하고 총무원장을 세 번이나 역임했고, 동국학원 이사장을 두 번이나 맡으며 한국 불교를 크게 중흥시켰다.
1983년부터 스님은 전등사 극락암에 주석하시면서 참선 수행에만 전념한다.
그리고 1995년 11월 15일 여느 날처럼 자리에서 일어나 먼 산을 한 번 쳐다보고는 자리에 누우신 스님이 제자들에게 운을 뗐다.
“나는 오늘 갈 것이다.
오고 감이 없는 곳에서 새로운 삶을 살 것이다.
내가 죽거든 내 몸에서 사리를 수습하지 말 것이며 다비식도 조촐하게 하라.
낡은 몸을 태우는 일에 돈을 낭비하는 것은 불조를 욕되게 하는 짓이다.”
이렇게 당부한 서운 스님은 다음과 같은 열반송을 남겼다.
비록 형상 없지만 두드리면 곧 신령스러움 있고
심독으로 화탕지옥에서 평생을 지냈다.
이제 몸 버리고 고향에 돌아가니
차가운 달, 빈 산이 진리의 몸이로다.
공교롭게도 스님은 출가일과 득도일, 열반일이 똑같았다.
스님은 세수(세속 나이) 아흔셋, 법랍(스님이 된 뒤부터 세는 나이) 마흔다섯 해로 열반에 들었다.
강화 삼랑성 (江華 三郞城) - 일명 정족산성(鼎足山城)
지정 종목과 번호 : 사적 제130호
지정일 : 1964년 06월 10일
소재지 : 인천광역시 강화군 길상면 전등사로 37-41
전등사(傳燈寺)는 강화 삼랑성(江華 三郞城) - 일명 정족산성(鼎足山城) 안에 있다.
성의 축조 연대에 대한 확실한 기록은 없지만, 단군(檀君)의 네 아들 중에 세 아들(부루, 부소, 부여)이 쌓았다는 전설로 그 이름을 삼랑산성(三郞山城) 혹은 정족산성(鼎足山城)이라고도 한다.
성곽은 잡석(雜石)으로 축조되어 삼국시대 석성구조(石城構造)를 보여 주고 있으며 고려시대에 보수(補修)하였고 조선시대에 중수(重修)가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성문은 네 곳에 있으며 문루(門樓)는 남문에만 있고 종해루(宗海樓)라 하였다.
또한 <조선왕조실록>이 소장된 마니산의 사고(史庫)가 옮겨와 보존되었었다.
그리고 성내에는 고구려 소수림왕 11년(381년)에 창건된 유서 깊은 전등사(傳燈寺)가 있으며, 고려 고종 46년(1259년)에는 이 성안에 궁궐(이궁)을 지었으나 현재는 무너지고 터만 남아 있다.
조선 현종 1년에 조선왕조실록을 보관할 사고를 설치하였는데, 무너진 것을 1998년 강화군에서 복원하였다.
조선 고종 3년 병인양요(丙寅洋擾) 당시에 프랑스군에 승리한 기념비로서 양헌수 승전비(梁憲洙 勝戰碑)가 서 있다.
삼랑성(정족산성)에는 동·서·남·북에 4대문이 있는데 문마다 문루가 없었으나 조선 영조 때에 남문에 문루를 건립하였다고 한다.
남문의 문루(종해루-宗海樓)가 무너져 없어진 것을 1976년 현재와 같은 모습으로 복원하였다.
- 안내문에서 -
삼랑성(정족산성) 남문(南門)으로 나오며 본 길가에 핀 글라디올러스와 흰색 접시꽃...
나 자신을 맑고 향기롭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