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

거제도 포로수용소 외

로제로제 2015. 7. 2. 22:05

 

 

통영... 거제... 진주...

 

거제 해금강

 

충혼탑 - 통영시 원문생활공원

 

통영지구 전적비 - 통영시 원문생활공원

통영지구 전투는 1950년 8월 17일 한국 최초의 상륙작전을 감행하여 2일 만에 적의 수중에 있던 통영 시가지를 탈환하고 실지회복의 선봉이 된 전투이다.

 

그날의 총탄은 멈추었고 포성은 잠들었으나,

충무의 바다와 원문고개에 피어난 호국의 충혼이여!

영원하라!

 

통영지구 전적비 앞에서 내려다 본 아름다운 통영 앞바

 

 

 

 

거제시로 갑니다.

 

거제시 바람의 언덕으로 가는 도중에 내려다 본 바닷가 마을

 

바람의 언덕으로 가는 길임을 상징하는 바람개비들...

(뒤돌아보며 찰칵!...)

 

바람의 언덕 (거제도)

 

 

 

 

거제도 포로수용소 유적공원으로 향합니다.

 

거제도 포로수용소 유적 - 경상남도 문화재자료 제99호 (지정일: 1983.12.20)

경남 거제시 장평리, 수월리 및 신현읍 양정리, 고현리에 소재

 

입장요금표

어른 개인 7,000원 단체 5,000원 거제시민 3,000원

청소년/군인 개인 5,000원 단체 3,500원 거제시민 2,500원

어린이(초등학생) 개인 3,000원 단체 2,000원 거제시민 2,000원

경로우대(만65세 이상) 3,000원

입장료 면제대상: 국가보훈대상자 등

 

입장시간

하절기(3월~10월) 09:00~18:00

동절기(11월~2월) 09:00~17:00

여름휴가철(7월20일~8월15일) 08:30~18:30

 

거제도 포로수용소 유적공원

 

거제도 포로수용소

1950년 11월부터 고현· 상동· 용산· 양정· 수월· 해명· 저산지구 등 360만평에

포로수용소를 설치하여, 인민군 15만, 중공군 포로 2만, 여자포로와 의용군 3천명 등

최대 17만 3천명을 수용하였다.

 

1953년 7월 27일 휴전협정 후 폐쇄되었고, 친공포로들은 판문점을 통하여 북으로 보내졌다.

이때 자유의사로 북으로 귀환할 것을 거절한 북한 출신 포로는 48,000여 명이었다.

현재는 수용소의 잔존건물 일부만이 곳곳에 남아 당시의 상황을 말해준다.

한국전쟁의 참상을 말해주는 민족역사교육의 장소로, 문화재로 지정하여 관리하고 있다.

 

동족 간에 서로 총부리를 겨누고 수많은 목숨을 앗아간 민족의 비극... 6.25

저들은 아직도 자신들이 일으킨 동족상잔의 침략전쟁을 "민족해방전쟁"이라고 미화하여 부른다.

누가 누구를 해방시키겠다는 건지...

 

또한 저들은 그들의 소위 "민족해방전쟁"을 막았다는 이유로 이승만 초대 대통령과 미국의 맥아더 원수를 아직까지도 철천지원수로 여기며 인천 자유공원에 있는 맥아더 장군 동상을 때려 부수려고 한 적도 있습니다.

 

6.25 당시 유엔(UN) 참전 16개국의 국기와 우리나라 태극기 및 유엔(UN)

 

 

 

1950년 6월 25일 새벽, 사전에 철저히 전쟁준비를 한 김일성은 3.8선을 넘어 기습 남침하였습니다.

 

김일성의 기습 남침에 맞서 우리 국군은 목숨 바쳐 싸웠지만...

 

당시 참전 유공자들의 말에 의하면, 포로 중에는 아주 나이 어린 인민군도 많았다고 합니다.

어찌 부모님이 보고 싶지 않고, 어찌 고향에 가고 싶지 않았으랴...

 

포로들의 생활을 보여주는 장면들...

 

포로들은

제네바협약과 국제법의 관례에 따라 관리되었으며, 하루 세끼의 식사제공과 형식적인 노동 작업, 그리고 자유시간에는 각종 운동, 독서, 목욕, 세탁 등을 하였다.

또한 다양한 실기교육, 교양강좌 시간을 활용하는 등 자율적인 내무생활이 허용되었다.

 

그러나 포로수용소는 포로의 수가 늘어남에 따라, 잠잠할 날이 없었반공포로와 친공포로 간의 유혈사태와 친공포로의 폭동이 자주 발생하였으며. 

1952년 5월 7일에는 친공포로들이 수용소 소장인 돗드(Francis T. Dodd) 준장을 납치하는 거제도 포로소요사건을 일으켜 한 달이 지난 6월10일 무력으로 진압되었다.

 

곳곳에 당시의 경비 망루(감시탑)를 재현해 놓은 모습

 

"공화국으로 돌아가자" 면서 낫, 망치, 도끼, 총칼을 들고 설치며 덤볐던 친공 포로들...

 

전쟁은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기에 인민군에 징집되었다가 포로로 잡힌 여자 포로들도 300여명에 달했다고 합니다.

 

여자 포로들의 수용소 생활모습

 

대동강철교

 

중공군의 참전으로 국군이 다시 후퇴하게 되자 피난민들은 폭파된 평양의 대동강 철교를 타고, 자유를 향해 처절하고 험난한 피난의 길에 올랐다.

 

- 유엔군의 폭격으로 폭파된 대동강 철교를 타고 내려오는 1.4후퇴 당시 피난민들...

 

 

흥남(興南) 철수작전 기념비

 

전쟁, 분단 그리고 화(상징 조형물)

 

화합이라... 얼핏 들으면 좋은 말이지만,

동족에게 먼저 총칼을 들이대 수많은 목숨을 앗아간  민족반역자 김일성은 사죄의 말 한마디 없이 저 세상으로 갔고...

화합을 위해서는 무조건 퍼다줘야 한다던 대통령도 저 세상으로 갔고...

NLL이 남쪽에 았으면 어떻고, 북쪽에 있으면 어떻고, 그 까짓 NLL이 없으면 어떠냐 고 했던 대통령도 저 세상으로 갔고...

NLL 같은 건 없어도 괜찮다는 그 대통령의 남북정상 대화록이 나오면 정계 은퇴하겠다던 사람은 언제 그랬냐는 듯이 시치미 떼고 있고...   

 

전쟁 때문에 희생된 이들의 유족과 아직도 고통에 시달리는 전상자와 수많은 남북의 이산가족들이 치를 떨고 있는 이 현실을 잊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아직도 북한은 송환하지 않은 6.25 국군포로의 정확한 숫자와 생사 여부를 숨기고 있습니다.  

친북 좌파들은 특히 거짓말을 잘 한다는 점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포로수용소 유적 구경을 마치고 바닷바람 쐬러 갑니다.

 

 

 

 

해금강... 아름다운 섬과 고기잡이배와 유람선들이 그림 같은 풍경입니다.

 

 

 

십자동굴 입구

 

십자동굴 내부

 

 

 

 

 

한 폭의 그림같은 절경... 해금강

 

 

 

 

외도 선착장에 닿았습니다.

 

 

외도 해상 식물공

 

외도(外島)는 경상남도 거제시 일운면 와현리에 속한 섬이다.

한려해상국립공원에 속하며 거제도에서 4km 떨어진 곳에 있다.

원래는 외딴 바위섬이었으나 개인이 사들여 농원으로 개발한 뒤 1976년 관광농원으로 허가받고 4만 7,000평을 개간하여 1995년 4월 15일 해상식물공원인 외도해상농원을 개장하였다고 한다.

 

 

 

 

 

 

 

 

외도를 30년이 넘는 세월 동안 아름답게 가꾼 고(故) 이창호씨와 최호숙씨 부부의 이야기

 

 

 

 

진주로 향합니다.

 

영남포정사문루 (嶺南布政司門樓) - 경상남도 문화재자료 제3호 (지정일: 1983.07.20)

 

조선시대 경상남도 관찰사가 업무를 처리하던 영남포정사의 정문이다.

조선 광해군 10년(1618) 병사를 지내던 남이흥이 내성의 동쪽 문을 고쳐 세우고 옆에 대변루(待變樓)를 새로 지었는데, 이것이 망미루의 본래 건물이다.

후에 영남포정사라고 하였으며, 경상남도 도청을 부산으로 옮기기 전까지 도청의 정문으로 사용하였다.

‘망미루(望美樓)’라는 현판은 수원 유수를 지낸 서영보가 쓴 것이다.

 

진주성(晉州城)과 진주 남강(南江)

 

김시민 장군상(像)

김시민(金時敏) (1554년 ~ 1592년)장군은 1591년 진주판관이 되어 이듬해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목사 이경(李璥)과 함께 지리산으로 피했다가 목사가 병으로 죽자 초유사(招諭使) 김성일(金誠一)의 명에 따라 그 직을 대리하였다.

민심을 안정시키고 피난했던 성민을 귀향하게 하였다. 그리고 성을 지키기 위해 성을 수축하고 무기와 기재를 정비하는 한편, 군사의 항오(行伍)를 편성, 군사 체제를 갖추었다.

 

임진왜란 당시 왜적은 진주가 전라도로 통하는 경상우도의 대읍(大邑)이며, 경상우도의 주력이 그곳에 있음을 알고 대군으로 공격하려 하였다. 그리하여 10월 5일 적은 진주의 동쪽 마현(馬峴)에 출현했고, 6일에는 진주성을 공격하기 시작하였다.

이에 성안에 명령을 내려 노약자와 부녀자까지 남장을 시켜 군사의 위용을 보이게 하는 한편, 화살을 함부로 쏘아 허비하지 않도록 주의를 환기시키는 등 적과의 싸움에 대처해 만반의 준비를 하였다.

 

적의 2만여 대군이 성을 포위하자 불과 3,800여 명의 병력으로 7일간의 공방전 끝에 크게 무찔러 이겨 임진왜란 3대첩으로 꼽히는 진주대첩을 이루었으나 이 싸움에서 이마에 탄환을 맞았다.

병상에 누워 있으면서도 국사를 근심하고 때때로 북향해 절하고 눈물을 짓다가 상처가 깊어져 며칠 뒤에 죽었다.

 

죽은 뒤 성에서는 적이 알까봐 비밀로 했다가 안정이 된 뒤 상을 치렀는데, 상여가 함양에 이르자 경상우도병마절도사에 발탁되었다는 조정의 명을 받았다.

1604년 선무공신(宣武功臣) 2등과 영의정에 각각 봉해졌고, 이와 함께 상락부원군(上洛府院君)에 추봉되었다. 진주의 충민사(忠愍祠)·산성정충당(山城旌忠堂)에 제향되었다. 시호는 충무(忠武)이다.

 

천자(天字)총통, 지자(地字)총통, 현자(玄字)총통 - (위에서 부터)

 

정충단비(좌)와 김시민 장군 전공비(우)

 

김시민장군 전공비(金時敏將軍戰功碑) - 경남유형문화재 제1호 (지정일: 1972년 02월 12일)

경남 진주시 본성동. 진주성 내에 있다. 

임진왜란 때 진주성 싸움을 승리로 이끈 김시민(1554∼1592) 장군의 공을 기리기 위하여 세운 비.

임진왜란 중 3대 대첩의 하나인 제1차 진주성 전투를 승리로 이끈 장군 김시민(金時敏)의 전공을 기록하기 위하여 1619년(조선 광해군 11) 7월에 세운 비이다.

 

당시 김시민 장군은 3,800명의 적은 병력으로 2만여 명의 왜적을 격퇴하고 진주성을 지켰다.

적은 군사를 이끌고 승리를 거두었을 뿐만 아니라 영남에서 호남으로 나아가는 길목인 이곳 진주성을 사수(死守)함으로써 왜적의 호남 진출을 봉쇄하였고 우리 측에 불리했던 전세를 뒤집고 전열을 가다듬은 계기를 마련하였다.

이 비는 임진왜란이 끝난 후 진주 고을 백성들의 열망에 의하여 세워졌으며 성균관 진사 성여신(成汝信)이 글을 짓고 성균관 생원 한몽인(韓夢寅)이 글씨를 썼다.

 

 

촉석정충단비(矗石旌忠檀碑) - 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2호 (지정일: 1972년 02월 12일)

1593년(선조 26) 6월 제2차 진주성 전투에서 나라를 위해 충절을 다하고 장렬하게 순국한 삼장사(三將士) 및 진주목사 장윤, 의병장 고종후(高從厚) 등 군·관·민의 영령을 제사하기 위하여 세운 정충단의 비석으로 1686년(숙종 12)에 진주성(晉州城:사적 118) 내에 세웠다. 삼장사는 창의사(倡義使) 김천일(金千鎰), 충청도 병마절도사 황진(黃進), 경상우도 병마절도사 최경회(崔慶會)를 일컫는다.

 

선조 25년(1592)년 제1차 진주성 전투에서 막대한 피해를 입고 패한 왜군은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의 명령에 의해 가토 키요마사(加藤淸正), 고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 등이 최정예 대군을 이끌고 진주성을 다시 공격하였다. 진주성의 군관민은 열세에도 불구하고 용감히 싸우다 전원이 순국하는 장렬한 최후를 맞이하였으니 숙종 12년(1686) 이들을 기리기 위해 촉석루 동쪽 정춘단을 세웠다.

 

호국종각(護國鐘閣)

 

촉석루(矗石樓) - 경남문화재자료 제8호 (지정일: 1983년 07월 20일)

 

정면 5칸, 측면 4칸. 경상남도 문화재자료 제8호.

남강(南江)가 바위 벼랑 위에 장엄하게 자리잡고 있어 영남(嶺南) 제일의 아름다운 누각이다.

또한 임진왜란 때 의기 논개가 낙화(落花), 순국한 곳으로도 유명하다.

 

려 공민왕 14년(1365)에 창건하여 8차례의 중건과 보수를 거쳤던 이 누각은 진주성의 남장대(南將臺)로서 장원루(壯元樓)라고도 하였다.

전쟁이 일어나면 진주성을 지키는 지휘본부였고, 평화로운 시절에는 과거를 치루는 고시장으로 쓰였기 때문이다.

 

이 누각은 1725년(영조 1) 목사 안극효(安克孝)에 의하여 여덟번째 마지막으로 중수되었고, 현재의 건물은 6·25동란 때 불타 없어진 것을 1960년에 재건한 것이다. 

 

논개(論介)가 왜장을 끌어안고 순국한 의암(義岩)과 의암사적비

 

진주의암사적비(晉州義巖事蹟碑) - 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353호 (지정일: 2000년 1월 31일)

 

1592년(선조 25) 발발한 임진왜란 당시 제2차 진주성 전투(1593년)에서 성이 함락되어 7만의 군·관·민이 순절하자, 진주 남강의 의암에서 왜장을 껴안고 강물에 투신하여 순국한 논개(論介, ?∼1593)의 사적을 기록한 비이다.

현재 진주시 본성동 진주성 내에 있으며, 2000년 1월 31일 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353호로 지정되었다.

논개에 관한 이야기는 임진왜란 후 진주민들의 입으로 전해지다가 1620년(광해군 12) 유몽인(柳夢寅, 1559∼1623)이 지은 『어우야담(於于野譚)』에 실려 기록으로 남게 되었다.

 

당시 진주지역 사민(士民)들은 진주성이 함락된 날에 남강변에 제단을 마련하여 논개의 넋을 달래는 한편, 논개의 의로운 사적을 인정해 줄 것을 국가에 요구하였다.

그러한 과정 속에서 논개의 사적을 잊지 않기 위하여 1722년(경종 2) 진주의 선비 명암(明庵) 정식(鄭軾, 1683∼1746)이 『어우야담』의 기록을 바탕으로 지은 비문을 내용으로 담아 이 사적비를 세웠다.

이후 1741년(영조 17) 경상우병사 남덕하(南德夏, 1688∼1742)가 왕의 특명을 받아 비각을 세우고 ‘義妓論介之門(의기논개지문)’이라는 현판을 달았다.

 

비석의 높이는 145㎝이며, 너비는 60㎝, 두께는 15㎝이다.

비문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獨峭其巖 特立其女 - 홀로 가파르게 선 바위에 그녀가 우뚝 서 있구나.

女非斯巖 焉得死所 - 그녀가 이 바위 아니었다면 어찌 죽을 곳을 얻고,

巖非斯女 焉得義聲 - 이 여인 아닌들 그 바위 어찌 의로움을 들었으랴.

 一江高巖 萬古芳貞 - 남강의 높다란 바위 만고에 전할 꽃다운 정절일세.

 

이 비는 진주성 내에 위치하며 아래의 남강 의암과 마주하고 있어 논개의 순국정신을 더욱 흠모하게 하고 있다.

 

깍지가 풀어지지 않도록 열 손가락에 가락지를 낀 손으로 왜장을 끌어안고 남강(南江)에 몸을 던지는 논개의 부조상(浮彫像)

(자료 사진)

 

 

논개는 과연 기생이었나?

 

최경회(崔慶會) 장군의 후손들인 해주 최씨 전남 화순군 종회는 민순지의 <임진록> 등의 기록을 들어 논개가 1574년 전북 장수에서 태어나 1590년 어릴 적의 인연으로 최경회의 후처가 된 주논개(朱論介) 부인이라고 확인했다.

그전에는 유몽인의 <어우야담>에 따라 논개(論介)를 무심코 ‘진주 관기’로 여겨왔다.

물론 <어우야담>은 정식 역사 기록이 아니다.

 

해주 최씨 종회에 따르면,

1593년 경상우도 병마절도사인 최경회 장군은 제2차 진주성 싸움에서 패배한 뒤 자결했다.

최 장군과 함께 이 싸움에 참가했던 주논개(朱論介) 부인은 슬픔과 의분을 참지 못하고 촉석루에서 벌어진 왜적들의 승전 잔치에 ‘기생으로 가장해’ 숨어들어 깍지 낀 손이 풀리지 않도록 열손가락 마디마디에 가락지를 끼고 술에 취한 적장 게야무라 로쿠스케(毛谷村六助)를 껴안고 진주 남강으로 뛰어들어 적장과 함께 죽었다.

 

 

1846년(헌종 12) 당시의 현감 정주석(鄭胄錫)이 장수군 장수면(長水面) 장수리에 논개가 자라난 고장임을 기념하기 위하여 논개생향비(論介生鄕碑)를 건립하였다.

여기에서 조금 떨어진 주촌(朱村) 마을은 주논개의 할아버지가 살았던 곳으로 전해져 오고 있으며, 오른쪽 능선에 주논개 할아버지, 할머니의 묘소가 있다.

 

논개 사당인 의기사(義妓祠)로 들어가는 지수문(指水門) 

 

논개(論介)를 기리는 사당인 의기사(義妓祠)에 모셔진 논개 영정

 

논개(論介)의 초상

 

 (이 게시물은 회원의 동의로 옮겨 실은 자료입니다.)

 

    

행복은 마음에 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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