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주 태화산 마곡사
마곡사의 일주문입니다.
마곡사(麻谷寺) 경내도
마곡사(麻谷寺)는 충청남도 공주시 사곡면 운암리 태화산 동쪽 산허리에 있는 절이다.
643년(백제 의자왕 3년)에 자장율사(慈藏律師)가 창건하였으며, 고려 명종 때(1172년) 보조국사 지눌이 중수하였다.
창건 당시에는 대사찰이었으나, 현재 대웅보전(보물 제801호), 대광보전(보물 제802호), 영산전(보물 제800호), 사천왕문, 해탈문 등이 남아있다.
이 밖에 5층 석탑(보물 제799호), 범종(지방유형문화재 제62호), 괘불 1폭, 목패, 세조가 타던 연, 청동향로(지방유형문화재 제20호)가 있다.
마곡사라는 절의 이름은 신라 보철화상(普徹和尙)이 설법할 때 모인 대중(大衆)이 삼밭의 삼(麻)대같이 많다고 하여 마곡사(麻谷寺)라 하였다고 한다.
절을 감싸고 흐르는 태화천(泰華川)의 극락교를 건너기 전인 남쪽은 영산전(靈山殿), 매화당(梅花堂) 등 스님들의 수행공간이며, 극락교를 건넌 북쪽은 대광보전(大光寶殿)과 대웅보전(大雄寶殿) 등 부처님의 공간인 극락세계(極樂世界)를 상징한다.
우리나라 33 관음성지의 하나이며 조계종의 대전· 충남지역 70여 사찰을 관장하는 대본산(大本山)으로 조계종 제6교구 본사(本寺)이다.
- 안내문 등에서 -
마곡사의 연혁 안내판
마곡사 해탈문(麻谷寺 解脫門) - 충청남도 문화재자료 제66호
속세를 벗어나 부처님의 세계인 법계(法界)로 들어가는 문(門)을 상징합니다.
사자를 타고 있는 문수보살 상(像)과 금강역사 - 해탈문 안
금강역사와 코끼리를 타고 있는 보현보살 상(像) - 해탈문 안
천왕문(4대천왕문)
천왕문 안 양쪽으로 4대천왕(四大天王) 상(像)이 있습니다.
천왕문을 통과하면 태화천(마곡천이라고도 하고 희지천이라고도 합니다) 위에 놓인 극락교가 있습니다.
공주 마곡사 영산전(公州 麻谷寺 靈山殿) - 가운데 건물 - 보물 제800호
영산전은 석가모니 부처님과 일대기를 담은 팔상도를 모신 법당을 가리키는데 이 건물은 천불(千佛)을 모시고 있어 천불전(千佛殿)이라고도 부릅니다.
영산전의 영산(靈山)은 석가모니 부처님이 인도에서 법화경을 설파했던 영축산(靈鷲山)을 줄인 이름입니다.
참고: "영축산(靈鷲山)"을 "영취산"이라고도 읽는 이유는 “鷲”자를 “독수리 취”라고 표기하기 때문인데, 불교에서는 “축”으로 발음하는 것이 보편적입니다.
영산전은 임진왜란 때 불탄 뒤 효종 2년(1651년)에 각순대사(覺淳大師)가 다시 지었다고 합니다.
마곡사에서 가장 오래된 건물이며 조선 중기의 목조건축 양식을 대표할만한 것이라고 합니다
지금은 스님들의 동안거(冬安居) 수행기간(2014년 12월 6일 ~ 2015년 3월 5일)이어서 일반인의 출입이 금지되어있습니다.
영산전 편액
영산전의 편액은 세조가 김시습(金時習)을 만나기 위해 이 절에 왔다가 만나지 못한 채 돌아가면서 남긴 글씨라고 전합니다.
세조(수양대군)가 어린 조카 단종을 내쫓고 왕위를 빼앗자, 충절을 지킨 생육신(生六臣) 가운데 매월당(梅月堂) 김시습(金時習)은 세상을 떠돌다가 이곳 마곡사에 머물게 됩니다.
세조는 김시습에게 벼슬을 내렸지만 김시습이 응하지 않자,
"내가 덕이 없어 그런 것이니 김시습을 직접 만나 설득해 보리라"며 마곡사로 찾아옵니다.
그러나 세조가 온다는 소식을 미리 전해들은 김시습은 서둘러 부여(夫餘)의 무량사(無量寺)로 떠나버립니다.
허탕을 친 세조는 "신하 하나 못 얻는 내가 어찌 가마를 타고 돌아갈 수 있겠느냐"며 타고 온 연(輦 - 임금이 타는 가마)을 마곡사에 두고 갔다고 합니다.
마곡사 명부전(麻谷寺 冥府殿) - 충청남도 문화재자료 제64호
명부전 내부
지장보살을 중심으로 협시로 지옥을 출입한 승려 도명존자(道明尊子)와 전생부터 지상보살과 인연을 맺었다는 무독귀왕(無毒鬼王)을 두고 있습니다.
지장보살은 불교에서 구원의 이상을 상징하는 자비로운 보살로 모든 인간을 교화시켜 성불하도록 도와주는 보살입니다.
산신각 내부 - 산신도(山神圖)
특이하게도 할배 산신(山神)과 함께 할매 산신(山神) 안제부인도 모셔져 있습니다.
범종루(梵鐘樓)
심검당(尋劍堂) 및 고방(庫房) - 충청남도 유형문화재 제135호
심검당은 스님들이 일상생활을 하는 공간으로 “심검(尋劍)”은 “번뇌를 끊을 칼을 찾는다”는 의미라고 합니다.
정조 21년(1797년)에 보수공사를 했다는 기록이 있는 것으로 미루어 그 훨씬 이전에 건립된 것으로 보입니다.
건물은 ㄷ 자형으로 온돌방과 부엌및 마루를 만들어 조선시대 상류층 가옥과 비슷한 구조로 되어 있습니다.
기둥은 네모기둥과 둥근기둥을 혼합하여 세웠고, 마루 한편에는 효종 5년(1654년) 충청도 대흥의 안곡사(安谷寺)에서 만들어진 마곡사 동종(銅鍾-유형문화재 제62호)과 목어 등이 있습니다.
고방(庫房)은 심검당 북쪽에 있는 2층으로된 창고이며, 심검당과 같은 시기에 만들어진 것으로 보입니다.
고방 위층에는 조선시대 문신인 포저 조익(浦渚 趙翼 1579~1655)과 그의 셋째 아들인 송곡 조복양(松谷 趙復陽 1609~1671)의 문집 목판인 포저유서 및 송곡문집 판각(浦渚遺書 및 松谷文集 板刻 - 유형문화재 제126호) 등이 보관되어 있습니다.
- 안내문에서 -
공주 마곡사 오층석탑 - 보물 제799호
마곡사 대광보전 앞에 있는 고려 후기의 석탑이며, 높이는 8.7m이다.
이 탑은 고려 말기에 원(元)나라 라마교의 영향을 받아 세워진 탑으로 다보탑이라고도 불린다.
2층 기단위에 5층의 탑신(塔身)을 올린 후 머리장식을 올렸다. 일층 탑신에는 자물쇠를 새겼으며 이층 탑신에는 사방을 지키는 사방불(四方佛)을 새겼다.
머리장식으로 라마탑에 보이는 풍마동(風磨銅) 장식을 두었는데, 전 세계적으로 희귀한 사례이다.
대광보전 화재 때에 훼손되어 원래 탑재가 아닌 화강암으로 보수한 곳이 있으나 전체적으로 보존상태가 양호하며 고려시대 석탑의 양식을 잘 보여준다.
- 안내문 등에서 -
마곡사 대광보전 - 보물 제802호
대웅보전과 함께 마곡사의 본전(本殿) 건물이다.
처음 지은 시기는 알 수 없으나 조선 순조 13년(1813년)에 다시 지은 것이다.
건물 안 바닥에는 참나무로 만든 돗자리가 깔려있고, 그 위에 비로자나불이 모셔져 있으며, 부처님이 서쪽에서 동쪽을 보고 있는 것이 특이하다.
불단 위에는 불상을 더욱 엄숙하게 꾸미는 닫집을 정교하게 꾸며 달았다.
건축양식은 외관이 장대하면서도 화려한 특징을 갖는 다포식(多包式)이며 건물의 앞쪽엔 다양한 꽃살무늬의 문을 달았다.
건물 내부의 화려한 공간구성과 함께 조선 후기 건축의 특징을 잘 보여주는 훌륭한 전통 목조건물이다.
대광보전 편액
조선 후기의 문인이며 서화가로 병조참판과 한성판윤을 지낸 표암(豹菴) 강세황(姜世晃 1713-1791)의 글씨인 대광보전 편액.
표암(豹菴)이라는 낙관이 보이며 글씨체는 약간 흘림체로 힘이 있고 유려하다.
대광보전 내부의 불상 - 비로자나불
중생과 부처가 둘이 아니라는 뜻의 지권인을 하고 있는 비로자나불로 진리를 상징하는 부처님이다.
오른쪽 손가락 끝으로 왼쪽 손가락 끝을 덮어 누르고 있는 독특한 손모양을 하고 있다.
부처님이 건물의 정면이 아니고 서쪽에서 동쪽을 바라보게 봉안한 점이 특이하다.
대광보전의 전설
본래의 바닥은 정(井) 자 형태로 구획한 우물마루인데, 마루판은 대패가 아닌 자귀를 사용해 다듬은 판자로 목재의 결이 잘 드러나며 그 위로 참나무로 만든 삿자리를 깔았다.
전설에 의하면 어떤 앉은뱅이가 마곡사에 찾아와 자신의 불구를 낫게 해달라고 비로자나 부처님께 백일불공을 드리며 정성껏 삿자리를 짰다고 한다.
불공이 끝날 무렵, 삿자리가 완성되었고 앉은뱅이는 부처님의 자비로 자신도 모르게 일어서서 법당 문을 걸어 나갔다고 한다.
마곡사 대웅보전(麻谷寺 大雄寶殿) - 보물 제801호
원래의 건물은 임진왜란(壬辰倭亂) 때 불타 없어졌고 조선(朝鮮) 효종(孝宗) 2년(1651년)에 각순대사(覺淳大師)와 당시의 공주(公州) 목사(牧使) 이주연(李奏淵)이 다시 지은 것이다.
중수기(重修記)에는 대장전(大藏殿 - 경판을 보관하는 전각)으로 지었다는 기록이 있으나 언제부터 대웅보전으로 바뀌게 되었는지는 분명하지 않다.
건축양식은 조선시대에 유행하였던 다포식(多包式)으로서 외관이 화려하면서도 장중한 느낌을 준다.
지붕은 옆면에서 볼 때 여덟 팔(八)자 모양을 한 팔작지붕으로 처마의 네 모서리를 받쳐주기 위한 활주(活柱)가 세워져 있다.
기단(基壇)은 막돌 허튼 층 쌓기이며 외관상으로는 2층 건물 형태인 중층(重層)이지만 내부는 한 개의 층(層)이다.
마곡사 대웅보전 편액
건물 2층에 걸려 있는 현판은 신라 시대의 명필 김생(金生)의 글씨라고 전하는데 확실치는 않다.
공주 마곡사 대웅보전 목조삼세불상 - 충청남도 유형문화재 제185호
대웅보전 내부 중심에 석가모니불을, 좌우에 아미타불과 약사여래불을 모시고 있다.
대웅보전 안의 싸리나무 기둥
대웅보전 안의 이 싸리나무 기둥을 안고 돌면 아들을 낳는다는 속설이 있어 많은 사람들이 찾는다고 합니다.
그래서인지 기둥이 반질반질합니다...
건너편으로는 연화당과 공양간 등이 있습니다.
마곡사 석가모니불괘불탱(麻谷寺釋迦牟尼佛掛佛幀) : 보물 제1260호
마곡사 괘불(掛佛)은 1687년(숙종 13년, 강희 26년)에 조성되었다.
크기는 길이 1,079cm, 폭 716cm로 마본(痲本)을 바탕으로 삼았으며, 규모는 대형이다.
그린 스님은 능학(能學) 등 6인이다.
괘불은 야외 행사에 사용되는 의식용 불화이다.
특별한 행사가 있을 때에만 대광보전 앞에 있는 괘불대에 기둥을 세워 설치하며, 평소에는 괘불함에 넣어 보관한다.
마곡사 응진전(麻谷寺 應眞殿) - 1984년 5월 17일 충청남도 문화재자료 제65호
응진전(應眞殿)이란 석가모니의 제자인 16아라한(阿羅漢)을 모신 전각을 말한다.
나한전(羅漢殿), 나한당(羅漢堂) 또는 아라한전(阿羅漢殿)이라고도 하며, 1852년(조선 철종 3년)에 중수하였다.
건물의 규모는 다른 불전에 비하여 큰 편은 아니지만 조형적으로 단아한 모습을 보여주며, 세부 치목과 조각에서 조선 후기의 기법을 잘 표현하고 있다.
항마촉지인(降魔觸地印)을 하고 있는 석가모니불을 주불(主佛)로 하고 좌우에는 각각 미륵보살과 제화갈라보살, 아난(阿難)존자와 가섭(迦葉)존자, 16나한(十六羅漢)을 배치했고 마지막으로 범천(梵天)과 제석천(帝釋天)을 모셨다
십육나한(十六羅漢)은 수행을 완성하여 성자의 지위에 오른 존재로, 중생에게 복을 주고 바른 법으로 인도하는 불제자를 말한다.
백범당(白凡堂)
마곡사 경내 한쪽에는 김구 선생이 한때 마곡사 백련암(白蓮庵)에 원종(圓宗)스님으로 머물렀던 것을 기념하는 백범당이 있습니다.
백범당(白凡堂)
마곡사 안의 백범당(白凡堂)은 대한민국 임시정부 주석이며 독립운동의 지도자인 백범 김구(白凡 金九 1879 ~ 1949)
선생이 1896년 명성황후시해에 대한 분노로 황해도 안악군 치하포 나루에서 일본군 장교를 죽이고 인천형무소에서 옥살이를 하다가 탈옥하여 마곡사에 은거할 때, 원종(圓宗)이라는 법명으로 잠시 출가하여 수도했던 일을 기념하는 건물이다.
휴정(休靜) 서산대사(西山大師)의 선시(禪詩)로 백범 김구선생이 즐겨 쓰던 휘호가 걸려 있습니다.
踏雪野中去(답설야중거) 눈 덮인 들판을 걸어갈 때
不須胡亂行(불수호란행) 어지러이 함부로 걷지 말라
今日我行跡(금일아행적) 오늘 내가 가는 발자취가
遂作後人程(수작후인정) 뒷사람의 이정표가 되리니
백범 김구 선생의 기념식수 - 향나무
백범 김구선생은 1898년 마곡사를 떠난 후, 근 50년 만에 돌아와 대광보전 기둥에 걸려있는 주련
却來觀世間 猶如夢中事
각래관세간 유여몽중사
“물러나 세상을 보니 마치 꿈속 일 같구나"
라는 능엄경에 나오는 문구를 보고 감개무량하여 그 때를 회상하며 한그루의 향나무를 심어 놓았는데, 지금도 백범당 옆에 푸르게 자라고 있다.
백범 김구 선생 명상길 옆 정자
주차장으로 내려와 건너편에 보이는 장승마을 조각공원
서울로 돌아와 종로 어느 콩나물 국밥집에서 저녁식사...
거꾸로 기른 콩나물이라는데 어쨌든 구수한 맛이 일품인 전주식 콩나물 국밥이었습니다.
마곡사의 밤 - 노래 홍 희
자연, 여운, 미소가 있는 천년고찰 마곡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