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설

펄 벅 여사와 까치밥

로제로제 2018. 10. 22. 02:35

 

펄 벅 여사와 까치밥

 

1960년 가을에 한국을 방문한 미국의 여류소설가 펄 벅(Pearl S. Buck 1892∼1973) 여사를 당시 조선일보 문화부의 초년생 기자였던 故 이규태(李奎泰, 1933∼2006, 칼럼니스트 논설위원 역임)씨가 동행 취재를 했다고 한다.

 

 

 

비 오는 남산 - 노래  채 빈

 

 

 

 

 

경주를 여행하는 차 안에서 바깥을 내다보던 펄 벅 여사가 시골집 마당의 감나무 끝에 달려있는 여남은 개의 감을 보고는

"감을 따기가 힘들어서 그냥 두는 거냐?"고 물었다.

 

 

 

동행한 이 기자가 "'까치밥'이라고 해서 겨울에 새들이 굶주리지 않도록 남겨둔 것"이라고 설명하자,

 

펄 벅 여사는 "아, 바로 그거예요. 내가 한국에서 보고자 한 것은 고적이나 왕릉뿐만이 아니에요.

이런 모습만으로도 나는 한국에 잘 왔다고 생각해요."라며 탄성을 질렀다.

 

 

 

 

 

 

 

 

 

 

 

 

펄 벅 여사는 경주의 농촌마을에서 그녀로서는 진기한 광경을 목격했다.

그것은 황혼 무렵, 지게에 짐을 잔뜩 진 채 소달구지를 끌고 가는 농부의 모습이었다.

 

 

 

펄 벅 여사는

‘저렇게 힘들게 지게에 짐을 따로 지고 갈 게 아니라, 소달구지에 짐을 싣고 농부도 달구지에 타고 가면 더 편할 텐데...’

라고 생각하면서 농부에게 물었다.

"왜 소달구지를 타지 않고 힘들게 짐을 지고 가나요?"

 

 

그러자 농부가 말했다.

"아이구, 어떻게 타고 갑니까?

나도 하루 종일 일했지만, 소도 하루 종일 일을 한 걸요.

그러니 힘겹게 달구지를 끌고 가는 소를 위해서라도 짐은 내가 지고 가야지요."

 

 

 

 

 

 

그녀는 귀국해서 이 모습을 세상에서 본 가장 아름다운 풍경이었다며 여러 사람에게 되뇌었다고 한다.

"서양의 농부였다면 당연히 소달구지 위에 짐을 모두 싣고, 자신도 올라타 편하게 집으로 향했을 것이다.

하지만 한국의 농부는 소를 위하는 마음에서 자신의 지게에 짐을 지고 소와 함께 귀가하는 모습을 보면서 아주 깊은 감명을 받았다."

고 말했다고 한다.

 

 

1963년 출간한 펄 벅의 『갈대는 바람에 시달려도 : The Living Reed 첫머리에

"한국은 고상한 사람들이 사는 보석 같은 나라"라고 극찬한 것은 소(牛)뿐만 아니라, 날짐승까지도 배려하는 한국인의 고운 심성을 직접 보았기 때문이었다.

 

 

 

 

 

1960년 우리나라를 처음 방문한 후 유한양행 창업자인 故 유일한 박사의 주선으로 1967년 현 부천 펄 벅 기념관 자리에 전쟁 후 태어난 혼혈고아 2,000여 명을 위한 『소사희망원』을 세워 1974년까지 운영하였는데, 그곳이 바로 2006년 부천시 소사구 심곡본동에 건립된 『펄 벅 기념관』이다.

 

 

 

펄 벅

 

 

펄 벅(본명: 펄 시던스트라이커 벅 Pearl Sydenstricker Buck 1892년06월26일 - 1973년03월06일)은 미국의 여류 소설가로, 사회 인권운동가이자 아시아 지역 전문학자로도 활동했다.

중국, 한국, 일본 등 아시아 나라들을 배경으로 한 작품들을 통해 동양인의 정신을 서구에 소개하는 한편, 아시아 각국을 방문하여 여성과 아이의 인권 보호를 위한 자선 사업을 펼쳤다. 중화민국이 출범하던 시기 혼란한 중국을 배경으로 빈농 왕룽 일가 3대의 삶을 그린 대하소설 『대지』(大地 The Good Earth) 3부작(1931~1933)으로 '인종의 장벽을 뛰어넘어 인류 상호 간의 일체감을 일으켰다'라는 평가를 받았다.1932년 퓰리처상을 수상하고 1938년 노벨 문학상을 수상했는데, 미국 여류 작가로는 최초의 노벨상 수상이었다.
펄 벅은 1892년 6월 26일 미국 웨스트버지니아 주 힐스버러에서 태어났다. 아버지 앤드류 시던스트라이커와 어머니 캐리는 남부 장로교 출신 선교사로, 중국에서 선교 활동을 하던 중 휴가를 받아 미국에 돌아왔을 때 펄을 낳았다. 펄이 생후 3개월이 되었을 때 부부는 중국으로 돌아갔고, 펄은 18세 때부터 4년간 미국에서 대학을 다닌 것 외에는 약 40년을 중국에서 보냈다.
펄 벅은 2차 세계대전 때 미국의 OSS(Office of Strategic Services: 미국전략사무국)에서 중국 담당으로 들어오며 한국과 인연을 맺었다. 한국전쟁 후 한국의 수난사를 그린 소설 『갈대는 바람에 시달려도』(원제: The Living Reed)(1963년)와 한국의 혼혈아를 소재로 한 소설 『새해』(1968년)를 썼다. 1965년 다문화아동 복지기관인 펄 벅 재단 한국지부를 설립하였으며, 1967년 경기도 부천군 소사읍 심곡리(현 경기도 부천시 심곡본동 故 유일한의 공장 터)에 소사희망원을 세워 10여 년 동안 한국의 전쟁고아와 혼혈고아들을 위한 복지활동을 펼쳤으며, 한국을 직접 방문한 바도 있다. 한국을 방문하였을 때 스스로 박진주(朴眞珠)라는 한국어 이름을 지었다.

 

 

 

 

비울수록 가득하네

버릴수록 풍성하네

 

 

 

비 오는 남산 - 채 빈-1.wm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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