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

삼화사와 무릉계곡

로제로제 2014. 10. 21. 19:28


천년고찰 두타산 삼화사(頭陀山 三和寺)와 무릉반석 - 강원도 동해시


삼화사 국행수륙대재(國行水陸大齋) - 국가 중요무형문화재 125호



삼화사 입구인 무릉계곡


무릉계곡 옆으로는 이곳 출신 최인희 시인의 시비(詩碑)가 서있습니다.



무릉반석


무릉계곡 - 강원 동해시 삼화로

신선이 노닐었다는 무릉계곡 일명 무릉도원이라 불리우는 무릉계곡은 두타산과 청옥산을 배경으로 이루어진 계곡으로 호암소로부터 시작하여 약 4km 상류 용추폭포가 있는 곳까지를 이르며, 수많은 기암괴석과 절경들이 장관을 이루고 있어 마치 현존하는 선경에 와있는 듯 한 느낌을 준다. 태고의 신비와 전설 속에 무릉계곡은 이곳을 찾는 많은 관광객들을 매료시키기에 충분한 관광명소이다.


넓은 바위 바닥과 바위 사이를 흘러서 모인 넓은 연못이 볼만한 무릉계곡은 수백 명이 앉을만한 무릉반석을 시작으로 계곡미가 두드러지며 삼화사, 학소대, 옥류동, 선녀탕 등을 지나 쌍폭, 용추폭포에 이르기까지 숨 막히게 아름다운 경치가 펼쳐진다.

일명 무릉도원이라도 불리우는 이곳은 고려시대에 동안거사 이승휴가 천은사의 전신인 용안당에 머물며 〈제왕운기〉를 저술하였고, 조선 선조 때에 삼척부사로 재직 하고 있던 김효원이 제명 하였다고 한다.


기암괴석이 즐비하게 절경을 이루고 있어, 마치 선경에 도달한 것 같은 느낌을 주는 무릉계는 수많은 관광객을 도취시키며, 많은 전설과 역사를 간직하고 있는 유서 깊은 명승지로, 1977년 국민관광지 제1호로 지정되었다.


조선 전기 4대 명필가의 한 사람인 봉래 양사언의 석각과 삼척부사나 토포사들의 이름이 각각 10명 이상 새겨져 있으며, 매월당 김시습을 비롯하여 수많은 시인묵객들의 시가 1,500여 평의 무릉반석에 새겨져있다.


무릉반석 여기저기에는 수많은 명문들이 써놓은 글씨가 있다.

조선시대 4대 명필로 꼽히며, 한때 삼척부사로 재직하기도 했던 봉래 양사언의 ‘무릉명원 중대천석 두타동천’이라는 글씨도 한 부분을 차지하고 있다.(삼척부사 정하언이 썼다는 설도 있습니다)  - 안내문에서 -



금란정(金蘭亭)

한말까지 유림들은 향교 명륜당에 모여 유학강론에 전념하였으나 한일합병을 당하여 폐강하기에 이르자 이에 분개하여 우의를 다지는 금란계를 결성하고 이를 기념하기 위해 정자를 건립하기를 결의하였다. 그러나 일본 관헌들에 의해 제지당하여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그 뒤 1945년 해방을 맞이하자 금란계원과 그 후손들이 선인의 뜻을 계승하여 정자를 짓기로 합의하고 1949년 봄에 건립하였고 1956년 9월에 현재의 위치로 이전하였다.




매년 중요무형문화재 125호 국행수륙대재를 재현하고 있는 삼화사가 10월 17일부터 19일까지 사흘간 삼화사국행수륙대재를 봉행했습니다.

삼화사는 앞으로 국행수륙대재를 불교만의 의식이 아닌 유주, 무주 고혼들을 달래고 위무하며 무차평등을 실현해서 사회를 구성하는 모든 존재들의 소통과 화합을 상징하는 축제로 발전시켜 나갈 계획이라고 합니다.


두타산 삼화사 일주문


반석교(磐石橋)


반석교에서 내려다 본 무릉계곡 상류


삼화사 사적비 - 삼화사 입구

이곳은 고려시대에 동안거사(動安居士)로 불린 이승휴(李承休)가 살면서 <제왕운기>를 저술한 곳이기도 합니다. - 안내문에서-


경내 담장 옆에는 몇 가지 꽃이 피어있었습니다 ~


메리골드


송엽국


자주달개비꽃


소국(들국화)


천왕문




삼화사 국행수륙대재(國行水陸大齋) - 국가 중요무형문화재 125호

삼척시 근덕면에는 고려의 멸망과 함께 비운의 삶을 마감해야 했던 공양왕과 그의 두 아들이 묻혀있는 공양왕릉이 있는데 공양왕은 1392년 조선의 건국과 함께 삼척 지방에 안치돼 있다가 2년 뒤인 1394년 죽임을 당하게 됩니다.

조선 태조(이성계)는 공양왕과 고려 왕족들의 원혼을 달래고 혼란스러운 민심을 수습하기 위해 삼화사(三和寺)에서 국행수륙대재를 설행하게 합니다.


삼화사는 수륙재의 체계적인 재현과 계승을 위해 지난 2001년 보존회를 결성하고 노력한 결과로 2013년 12월 삼화사 국행수륙대재가 국가 중요무형문화재 제125호로 지정되었습니다.

무차와 평등, 화합과 소통의 문화축제로 거듭나고 있는 삼화사 국행수륙대재는 계층 간의 갈등과 반목이 사회문제로 대두되고 있는 우리들에게 상징적인 메시지를 전하고 있습니다.  -안내문 등에서-






삼화사 법당 적광전

삼화사(三和寺)의 유래

고려 태조 왕건이 “후삼국을 하나로 통일시켜 달라”며 기도를 한데서 유래되었다는 삼화사(三和寺)는 신라 선덕여왕 때인 642년에 자장율사가 처음 터를 잡고 “흑련대”라 하였으며 신라 경문왕 때인 864년에 범일국사가 “삼공암”이라 하였다.

“삼공암”은 고려 태조인 왕건의 원찰이었다.

왕건은 이곳 부처님 전에 후삼국의 통일을 간절히 염원했고 결국 고려 건국 20년 만에 삼국통일의 대업을 달성했다.

그리고 삼국에 얽힌 갈등 구조와 증오의 감정을 소통과 화합의 장으로 이끌어 내고자 “삼공암”을 “삼화사”로 이름을 바꾸었다.

이러한 왕실과의 인연은 조선조로 이어져 최초 국행수륙대재(國行水陸大齋)가 설행되게 되었으며 현재까지 그 맥을 이어오고 있다. -안내문에서-


철조 노사나좌불 - 보물 제1292호5431

삼화사에는 신라 때부터 모시고 있는 철불이 1좌 있다.

전설에 따르면 이 부처님은 약사삼형제불로 서역에서 석주(石舟)를 타고 동해로 와서 두타산에 자리 잡았다는 것이다. 이 같은 서역도래설은 동해안 일대의 사찰에서 몇 군데 더 나타난다.

이를테면 금강산 건봉사에는 53불이 들어왔는데 서역에서 배를 타고 왔다는 전설이 전한다.

또 경주의 기림사는 천축의 광유화상이 불상과 제자를 데리고 와서 절을 창건했다는 설화가 전한다.

이는 동해안지방 사찰들의 불연(佛緣)이 멀리 인도에 닿아 있음을 은연중에 내비치는 방편설화라고 추측된다.

삼화사 철불의 도래설도 이런 맥락 가운데 하나로 보이지만, 이로 인해 지방주민들의 종교적 신심 또한 매우 두터웠던 점은 이 도래설의 목적이 어디에 있는가를 추측케 한다.

-안내문에서-

(삼화사의 철불에 얽힌 이야기는 여러 가지가 있지만, 지면 관계상 생략함을 이해해 주세요. ~ ~ ~)


삼화사 삼층석탑 - 보물 제1277호

삼층석탑은 2단의 기단(基壇) 위에 3층의 탑신(塔身)을 올린 모습이다.

이 탑은 644년(신라 선덕여왕 13년)에 건립하였다는 설이 있으나 조성양식과 수법 등으로 볼 때 신라시대 말기인 9세기 후반의 것으로 추정된다.

1997년 4월 적광전 앞에서 지금의 자리로 옮기면서 해체하여 복원하였는데, 이때 기단 안에서 목함이 발견되었다.

그 안에는 곱돌로 만든 소탑 25기와 청동제 불대좌 조각 2점, 철조각 6점, 문서를 기록한 종이 1매 등이 들어있었다. -안내문에서-

(행사 관계로 사진을 찍을 수 없어서 다른 자료 사진을 올렸습니다)




약사전


약사전 내의 동방약사여래불

약사여래는 아픔과 슬픔을 소멸시켜주며 수명을 연장시켜주고 재난을 옶애주겠다는 12가지 큰 서원(誓願)을 세운 부처님으로서 대의왕불이라고도 합니다.






보호수



점심공양은 비빔밥과 떡(무차평등 나눔 떡)에 소박한 국...


마침 하늘 위로는 자유로운 영혼을 상징하는 듯... 한 마리의 새가 훠얼~ 훨 날아가고 있었습니다.


경내의 부도


단풍은 아직 이른 듯... 보였습니다.(10월 19일)


산짐승으로부터 보호하기 위한 무덤형태


구절초인가?... 쑥부쟁이인가?...






아래로 내려와서는 곱게 물든 단풍잎을 볼 수 있었지요...



하루쯤은 참 나를 찾는 고운 여행을 떠나보면 어떨런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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