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원 실상사
남원 실상사(南原 實相寺) 초입 해탈교 주위의 장승
남원 실상사 석장승(南原 實相寺 石長栍) - 중요민속문화재 제15호
전라북도 남원시 산내면 입석리
이 돌장승들은 실상사를 지키는 상징적인 조각품으로, 원래는 이곳에 모두 네 개가 서 있었는데 절로 가는 도중 내(만수천)를 건너기 전에 두 개의 장승 중, 오른쪽 것이 홍수에 쓸려 내려가 현재는 세 개만 남았다.
장승들의 높이는 대략 2.5~2.9m, 너비40~50cm 가량이며 머리에 모자를 쓰고 튀어나온 둥근 눈에 주먹코와 커다란 귀를 갖는 등 비슷한 양식을 보인다.
장승에 새긴 기록으로 보아, 같은 시기인 조선 영조 1년(1725년)에 세운 것들임을 알 수 있다.
장승은 보통 남녀로 배치해 음양의 조화를 꾀하는데, 이곳 장승은 모두 남자 형태이다.
귀신을 쫓는 장승들의 표정이 험상궂기는커녕 오히려 익살스럽고 해학적이다.
- 안내문에서 -
실상사로 들어가는 다리(해탈교) 위에서 보는 만수천(萬壽川) 풍경
흑미(검은쌀) 벼
방아깨비
연밭 너머로 실상사 건물들이 보입니다.
천왕문으로 들어가는 참배객들
실상사 일원(實相寺 一圓) - 사적 제309호 (전라북도 남원시 산내면 입석리)
실상사(實相寺)는 대한불교조계종 제17교구 본사인 금산사(金山寺)의 말사이다.
지리산 천왕봉을 마주하고 자리한 실상사는 통일신라 흥덕왕 3년(828)에 홍척(洪陟)스님이 처음 세웠다.
신라말기 교학보다 참선을 중시한 선종의 여러 종파가 전국 명산에 절을 세웠는데, 실상사가 그중 하나이다.
세조 때(1468) 원인 모를 화재로 전소됐다는 기록과 정유재란 때(1597년) 왜구에 의해 전소됐다는 설이 동시에 전해지고 있다.
숙종(1674년~1720년) 때 건물 36동을 다시 지었으나, 고종 때 화재를 당해 현재의 소규모로 복구하였다.
실상사는 훌륭한 스님들을 많이 배출하여 한국 선불교의 위상을 드높였다.
실상사 안내도
1.보광전 2.실상사 석등(통일신라, 보물 제35호) 3.실상사 동・서 삼층석탑(통일신라, 보물 제37호) 4.약사전 5.철조여래좌상(통일신라, 보물 제41호) 6.명부전 7.목탑지 8.범종각 9.극락전(전라북도 시도유형문화재 제45호) 10.증각홍척국사응료탑(통일신라, 보물 제38호) 11.증각홍척국사응료탑비(통일신라, 보물 제39호) 12.수철화상능가보월탑(통일신라, 보물 제33호) 13.수철화상능가보월탑비(통일신라, 보물 제34호) 14.편운화상승탑(도지정문화재 제247호) 외 3기 15.용담대화상탑 16.실상사 승탑(고려시대, 보물 제36호) 외 1기 17.회명당대선사승탑(조선후기 외 1기) 18.천왕문 19.종무소 20.대중방 21.템플스테이 22.해우소 23.해탈교 24.석장승(중요민속문화재 제15호) 25.건칠아미타불좌상(지방유형문화재 제258호) 26.건칠관음보살입상(지방유형문화재 제258호)
실상사 천왕문(實相寺 天王門)
실상사 사천왕 상(四天王 像)
동방(東方)을 지키는 지국천왕(持國天王) - 보검을 들고 있고
남방(南方)을 지키는 증장천왕(增長天王) - 용(龍)과 여의주를 들고 있으며
서방(西方)을 지키는 광목천왕(廣目天王) - 삼지창과 보탑(寶塔)을 들고 있고
북방(北方)을 지키는 다문천왕(多聞天王) - 비파를 들고 있다.
실상사 경내
보광전 앞에 석등(보물 제35호)이 있고 좌.우로 실상사 동・서 삼층석탑(보물 제37호)이 서 있다.
실상사 동・서 삼층석탑 - 보물 제37호 지정일: 1963. 1. 21
이 쌍둥이 석탑은 통일신라 말 실상사를 처음 지으면서 함께 세운 것이다.
높이는 8.4m로 전형적인 통일신라시대 석탑이다.
층마다 몸체와 지붕을 각각 별개의 돌로 만들고, 각층 몸체의 모퉁이에는 기둥모양을 조각했다.
서쪽 탑은 아쉽게도 꼭대기 일부를 잃어버렸으나, 두 석탑 모두 윗부분이 비교적 원래대로 남아 있어 그 화려했던 모습을 짐작하게 한다.
실상사 동・서 삼층석탑 - 보물 제37호
실상사는 828년(흥덕왕 3)에 홍척국사(洪陟國師)가 구산선문(九山禪門)의 하나인 실상산문(實相山門)을 개산(開山)하면서 창건하였다고 전해진다.
도의(道義)와 함께 중국 당나라에 건너가 지장선사의 선법을 받고 귀국한 홍척은 신라의 남쪽인 지리산에 자리잡아 활동하고, 도의는 신라의 북방인 설악산을 근거로 선종(禪宗)을 전국에 전파하였다.
그 뒤 2대조(代祖) 수철(秀澈)을 거쳐 3대조 편운(片雲)에 이르러서 절을 크게 중창하고 선풍을 더욱 떨치게 되었다.
그러나 1468년(세조 14)에 화재로 모두 불타버린 후 200년 동안 폐허로 남아 있었고, 승려들은 백장암(百丈庵)에 기거하면서 그 명맥을 이어왔다.
그 뒤 1679년(숙종 5)에 벽암(碧巖)이 삼창(三創)하였고, 1684년 계오(戒悟)가 현재의 극락전(極樂殿)인 부도전(浮屠殿)을 지었다.
1690년에 침허(枕虛)를 중심으로 300여 명의 수도승들이 조정에 절의 중창을 상소하여 1700년(숙종 26)에 36동의 건물을 세웠다.
또한 1821년에는 의암(義巖)이 다시 중건하였으나 1882년(고종 19) 함양 출신 양재묵(楊載默)과 산청 출신 민동혁(閔東赫)에 의해 사찰건물들이 불타 없어지는 수난을 겪었으며, 1884년에 월송(月松) 등이 중건하였다.
1903년(광무 7) 익준(益俊)이 승당을 지었으며, 1932년 칠성각을 세웠다.
남원 실상사 석등 - 보물 제35호 지정일: 1963. 1. 21
이 석등은 실상사 보광전 앞뜰에 세워져 있다.
석등은 불을 밝히는 화사석(火舍石)을 중심으로 밑에 3단의 받침을 쌓고, 위로는 지붕돌과 머리장식을 얹었는데, 평면은 전체적으로 8각형을 기본으로 하고 있다.
화사석은 8면에 모두 창을 뚫었는데, 창 주위로 구멍들이 나 있어 창문을 달기 위해 뚫었던 것으로 보인다.
머리장식에는 화려한 무늬를 새겨 통일신라 후기의 뛰어난 장식성을 잘 보여준다.
보광전(普光殿)
실상사의 주법당(主法堂)인 보광전은 1884년(고종 21)에 월송대사가 세운 것으로 정면 3칸, 측면 3칸의 건물이다.
현재는 단청이 되어 있지 않아 소박한 모습으로 실상사를 찾는 사람들을 맞이하고 있다.
그렇지만 조선후기의 건축양식을 살필 수 있는 좋은 자료로써, 보광전 주변에는 83평을 추정케 하는 주춧돌이 남아 있어 굉장한 규모였음을 보여주고 있다.
이러한 사실은 1991년 동국대 박물관에 의한 보광전 주변 발굴에서 이미 증명되었다.
보광전 내부
건물 안에 모셔진 삼존상 중 본존불(아미타부처님)은 조선시대에 조성한 것이고, 좌우의 관음, 세지 두 보살은 원래 극락전에 아미타불과 함께 봉안되었던 것으로 월씨국(베트남)에서 모셔왔다고도 한다.
불상 뒤에는 아미타여래도가 있고, 불단 오른편에는 1981년에 만든 신중불화와 산신불화가 있다.
약사전(藥師殿)
약사전은 몸과 마음의 질병을 낫게 함으로써 중생을 교화하는 서원을 세운 약사여래를 봉안하는 전각으로 정면 3칸, 측면 2칸의 건물이다.
1883년 함양, 산청 유생들의 방화에도 불타지 않고 지금까지 남아 있는데, 특히 중앙의 꽃문창살은 단청이 선명해 아름다움을 더하고 있다.
전각 안에는 통일신라시대에 철로 만든 약사불상(보물 제41호)과 불상 뒤에는 조선 후기에 그린 약사불화가 있다.
철조 약사여래좌상 - 보물 제41호
약사여래는 중생의 병고 뿐만 아니라 현실세계의 부족함을 채워주는 현실이익적인 부처님이다.
이처럼 약사여래는 인간의 생노병사 가운데 가장 고통스러운 병과 관련이 있기 때문에 우리 나라에 약사신앙이 전래된 이후 계속 신앙되었다.
약사불상이 다른 불상과 구별되는 가장 큰 특징은 한 손에 약그릇을 들고 있는 점이다.
그러나 현재 약사불로 신앙되고 있는 불상 가운데는 약그릇을 가지고 있지 않는 경우도 있는데, 실상사의 약사여래도 약그릇을 갖고 있지 않다.
그렇기 때문에 이 불상을 통일신라 말 구산선문에서 본존으로 모시던 노사나상(盧舍那像)이라고도 하며, 근래에는 원래의 손이 아미타 수인을 하고 있어 아미타불이라고도 한다.
그러나 제2대 조사인 수철국사가 약사여래상과 석탑 2기를 세웠다는 설이 있어 현재 약사전에 봉안된 철조여래상은 수철국사가 조성한 약사불이 아닌가 한다.
철조 약사여래좌상 - 보물 제41호
이 불상은 실상사가 중창될 때까지 들판에 있었으며, 약사전을 세운 후 그 안에 봉안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이 불상에는 보화(寶貨)가 많이 들어 있다는 말이 있어 일찍부터 도굴꾼에 의해 훼손된 적이 있다.
불상의 복장품에는 효령대군의 발원문과 사경(射經) 및 인경(印經)이 수백 권이나 있었고, 고려판 화엄경소 등 보기드문 서적도 있었다고 하는데 그 중 일부는 도난 당하였고, 나머지는 건물과 함께 불탔다고 한다.
현재의 두 손은 나무로 만들어 끼워 넣은 것으로, 1987년 복원할 때 나온 철제 손과 같은 모양이다.
대좌는 흙으로 만들었으나 허물어진 곳이 많아 자세한 모습은 알 수 없다.
명부전(冥府殿)
명부전은 갖가지 지옥의 장면을 그린 시왕(十王)의 그림이나 조각을 모신 전각으로 주존은 지장보살이다.
실상사의 명부전은 길선당(吉禪堂)의 옛터에 건립된 것으로 장육전(丈六殿) 동쪽에 있던 것을 1821년(순조 21)에 의암대사가 옮겨 지은 것이다.
정면 3칸 측면 3칸의 건물로 안에는 지장보살 삼존상, 시왕상 10구, 판관상 6구, 인왕상 2구가 있다.
지장보살상 뒤에는 1987년에 조성한 지장시왕도가 있다.
범종각(梵鐘閣)
옛 기와탑
이 탑은 통일신라시대 구산선문(九山禪門) 중 가장 먼저 개창한 유서 깊은 사찰인 실상사에서 출토된 통일신라와 조선시대의 기와들을 모아 쌓은 것이다.
실상사 경내 풍경
실상사 목탑지(木塔址)
실상사 목탑지 안내문
칠성각(七星閣)
극락전 가는 길
극락전(極樂殿) - 전라북도 유형문화재 제45호
극락전은 명면 3칸, 측면 2칸인 맞배지붕의 목조건물로 전라북도 유형문화재 제45호이다.
극락전의 옛 이름은 부도전(扶道殿)으로 계오대사가 1684년(숙종 10)에 건물을 짓고 부도전(浮屠殿)이라 하였다.
이와 같이 부도전이라 한 것은 근처에 홍척국사와 수철화상의 부도가 있기 때문이다.
1751년(영조 27)에 포문비구(抱文比丘) 한심(漢諶)이 옛 연하당(蓮荷堂)과 금당(金堂)의 기와를 사용하여 요사채를 수리하고 부도전(扶道殿)으로 이름을 바꾸었다.
1788년(정조 12)에 금파 관오대사가 대시주 이휘와 별좌 홍찬, 재민과 더불어 중수하였다.
1832년(순조 32)에 의암대사가 기봉, 처윤과 함께 중건하여 극락전으로 이름을 바꾸어 현재에 이르고 있다.
극락전 내부
불단 위에는 아미타여래좌상이 있으며, 그 좌우에는 목조보살상이 있었으나 몇 년 전에 분실하였다.
남원 실상사 증각대사탑 (실상사 증각대사응료탑) - 보물 제38호 (지정일: 1963. 1. 21)
이 부도는 신라(新羅) 구산선문(九山禪門) 가운데 최초의 산문(山門)인 지리산(智異山) 실상산문(實相山門)의 개산조(開山祖) 홍척국사의 사리탑(舍利塔)으로 신라 말인 9세기 후반의 우수한 조각수법(彫刻手法)을 보여 주고 있다.
홍척은 통일신라 후기의 승려로 시호는 '증각(證覺)'이다.
8각의 평면을 기본으로 삼고 있는 전형적인 팔각원당형 부도이다.
남원 실상사 증각대사탑비 (실상사 증각대사응료탑비) - 보물 제39호 (지정일: 1963. 1. 21)
실상사에 있는 증각대사의 탑비이다.
증각대사(證覺大師)는 홍척국사(洪陟國師)・실상화상(實相和尙)・남한조사(南韓祖師)로 불리며, 통일신라 헌강왕 때에 당나라에 들어갔다가 흥덕왕 1년(826)에 귀국한 뒤 구산선문의 하나인 실상산파(實相山派)를 세운 고승이다.
이 비는 신라(新羅) 실상산문(實相山門)의 개산조(開山祖) 홍척국사(洪陟國師)의 묘탑에 대한 석비(石碑)이다.
현재 비신(碑身)은 없어지고 거북받침돌과 머릿돌만이 남아 있는데, 이수(螭首) 정면 중앙에는 '응료탑비(凝蓼塔碑)'라고 전자(篆字)로 새겨져 있다.
받침돌은 용의 머리를 형상화 하지 않고 거북의 머리를 그대로 충실히 따랐다.
머릿돌은 경주의 '태종무열왕릉비' 계열에 속하는 우수한 조각을 보여 준다.
남원 실상사 수철화상탑 (실상사 수철화상능가보월탑) - 보물 제33호 (지정일: 1963. 1. 21)
실상사 안에 있는 극락전을 향하여 그 오른쪽에 서 있는 탑으로, 수철화상의 사리를 모셔 놓은 사리탑이다.
수철화상은 신라 후기의 승려로, 본래 심원사(深源寺)에 머물다가 후에 실상사에 들어와 이 절의 두번째 창건주가 되었다.
진성여왕 7년(893)에 77세로 입적하니, 왕은 그의 시호를 '수철화상(秀澈和尙)'이라 하고, 탑 이름을 '능가보월(楞伽寶月)'이라 내렸다.
남원 실상사 수철화상탑비 (실상사 수철화상능가보월탑비) - 보물 제34호 (지정일: 1963. 1. 21)
실상사에 위치한 수철화상의 탑비이다.
수철화상은 통일신라 후기의 승려로, 본래 심원사에 머물다가 뒤에 실상사에 들어가 수도하였다.
진성여왕 7년(893) 5월 77세로 이 절에서 입적하자 왕이 시호와 탑명을 내렸다고 한다.
비문에는 수철화상의 출생에서 입적까지의 행적과 사리탑을 세우게 된 경위 등을 기록하고 있다.
그는 실상사에서 입적하였으나 심원사의 승려이었기 때문에 비문에는 '심원사 수철화상'으로 적고 있다.
비문을 짓고 쓴 사람은 알려져 있지 않으며, 마멸과 손상이 심한 편이다.
요사채
실상사 해우소를 지키고 있는 사마귀 ^^
실상사 경내
다시 천왕문으로 나갑니다.
사랑이 머문 가을...
행복이 여물도록...
묻고 싶어요 - 노래 송가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