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릉 오죽헌
강릉역
수호랑과 반다비 상(像)
강릉 오죽헌 · 박물관 안내판 - 오죽헌 보물 제165호
오죽헌은 최응현(1428-1507)이 사위 이사온(신사임당의 외할아버지)에게 물려준 집이다.
이곳에서 오만원권과 오천원권 화폐 인물인 신사임당(1504-1551)과 율곡 이이(1536-1584)가 태어났다.
강릉 오죽헌 앞의 어느 카페
강릉 오죽헌(江陵 烏竹軒) 정문
입장료: 어른 3천 원
KTX 승차권(영수증) 소지자는 50% 감면
경로우대 대상자(65세 이상), 국가유공자 · 유족은 무료
정문을 통과하여...
'오죽헌(烏竹軒)'이라는 이름답게 오죽(烏竹)이 반겨 줍니다.
오죽(烏竹)
줄기의 빛깔이 까마귀(烏)처럼 검은색이어서 오죽(烏竹)이라 불린다.
다년생 초본으로 죽순은 5~6월에 나오는데 첫해에는 초록색이었다가 다음 한 두 해를 넘기면 검게 된다.
60년을 살고 꽃이 피면 죽는다.
율곡 이이(栗谷 李珥) 상(像)
見得思義(견득사의)
이득을 보거든 옳은 것인가를 생각하라
일찍이 율곡선생이 황해도에서 공부하고 있을 때 양식이 없어 굶고 있다는 소식을 들은 황해 감사였던 친구가 쌀 한 말을 보냈다.
감사의 봉급으로 식솔을 먹여 살려야 하며 감사로서 써야할 다른 경비를 계산해 본 율곡은 보내준 한 말의 쌀이 친구의 개인 것이 아니라, 공적인 국고를 축냈다고 생각하여 즉시 되돌려 보냈다고 한다.
친구의 우정 어린 쌀이였지만 불의한 물건이라 판단하고 차라리 굶주림을 택했던 율곡의 견득사의(見得思義)정신이라고 보여진다.
신사임당 초충도 화단(申師任堂 草蟲圖 花壇) 안내판
신사임당(申師任堂)은 조선시대 예술가이다.
자수, 시문, 그림 등 여러 방면에 재능이 뛰어났는데, 특히 그림을 잘 그려 생존 당시에 이미 이름이 널리 알려졌다.
「초충도」·「산수도」·「묵포도도」 등 다양한 소재를 다룬 그림, 간결하고 단정한 필치의 「초서」·「전서」 등의 글씨, 「사친 思親」·「유대관령망친정 踰大關嶺望親庭」 등의 한시가 전한다.
드라마 '사임당, 빛의 일기' 촬영지 기념물
앞에 보이는 것은 주인공 이영애(극중배역 신사임당, 서지윤)와 송승헌(극중배역 이겸)의 기념 손도장
오죽헌 안내도
자경문(自警門)
강릉 오죽헌(江陵 烏竹軒) - 보물 제165호 (지정일 1963년 1월 21일)
소재지: 강원도 강릉시 율곡로3139번길 24(죽헌동)
강원도 강릉시 죽헌동에 위치한 오죽헌은 조선 초기에 건축되었으며 한국 주택 건축 중에서 가장 오래된 건물에 속합니다.
특히 건축적인 면에서 중요성을 인정받고, 조선 전기 주택을 살펴볼 수 있는 자료로서 완벽한 모습을 보여주는 구조적 가치가 뛰어나 1963년 1월 21일 우리나라의 보물 165호로 지정되었습니다.
오죽헌을 처음 지은 이는 세종 때 공조참판을 지낸 강릉 최치운(崔致雲)으로, 최치운은 이 집을 차남인 병조참판 최응현(崔應賢)에게 물려주었고,
최응현은 다시 그의 사위인 용인 이사온(李思溫)에게, 이사온은 무남독녀로 사위인 평산 신명화(申命和, 사임당의 부친)에게, 신명화는 또 그의
넷째 사위인 안동 권화(權和)에게, 권화는 그의 아들 권처균(權處均)에게 물려주어 1975년 박정희 대통령에 의해 성역화 사업으로 국가에 헌납할
때까지 안동 권씨 강릉파 종손 권용만(權容萬, 전 강릉사범대 교수)의 소유였습니다.
권처균은 집 주위에 검은 대나무가 무성한 것을 보고 자신의 호를 '오죽헌(烏竹軒)'이라 칭하였는데, 후에 이 '오죽헌'은 집의 이름이 되었습니다.
문성사(文成祠)
율곡 이이(栗谷 李珥) 선생의 영정을 모신 사당입니다.
'문성(文成)'은 1624년 인조 임금이 율곡에게 내린 시호로, '도덕과 학문을 널리 들어 막힘 없이 통했으며 백성의 안정된 삶을 위하여 정사의 근본을 세웠다'는 의미를 담고 있으며 현판의 글씨 `文成祠`는 고(故) 박정희 대통령이 썼습니다.
율곡 이이(栗谷 李珥) 영정
율곡 이이(栗谷 李珥 1536-1584)
본관 德水(덕수), 자 叔獻(숙헌), 호 栗谷(육곡), 石潭(석담),
시호 文成(문성), 강원도 강릉 출생이다.
사헌부 감찰을 지낸 이원수(李元秀)의 아들이며, 어머니는 사임당(師任堂) 신(申)씨이다.
명종 3년(1548) 진사시에 합격하였으며 16세에 어머니 신사임당이 세상을 떠나자 3년간 시묘한 후, 금강산에 들어가 불교를 공부하다가, 다음 해에 하산하여 성리학에 전념하였다.
율곡 이이(栗谷 李珥) 선생은 어려서 어머니에게 학문을 배워 13세에 진사초시에 합격하고 명종 19년(1564) 생원시, 식년문과에 모두 장원급제한 후, 아홉 차례나 과거시험에 장원을 해 '구도장원공(九度壯元公)'이라 불렸고 청주목사, 황해도 관찰사, 대사현과 호조, 이조, 형조, 병조 등의 판서를 역임하였다.
조선 유학계에 퇴게 이황 선생과 쌍벽을 이루는 대학자로서 기호학파를 형성하였고 당쟁의 조정, 10만 군대의 양병을 주장하였으며, 대동법, 사창의 실시에 노력하였다.
글씨, 그림에도 뒤어났으며 효성이 지극하였다.
문묘에 종사 되었고 선조의 묘정에 배향되었으며 파주의 자운서원, 강릉의 송당서원 등 20여 개 서원에 제향되고 있다.
오죽헌(烏竹軒)과 몽룡실(夢龍室)
오죽헌은 정면 3칸, 측면 2칸의 팔작지붕 건물입니다.
이 건물의 온돌방인 몽룡실(夢龍室)은 율곡 이이(栗谷 李珥) 선생께서 탄생하신 방입니다.
1536년 12월 26일 태어나실 때, 신사임당(申師任堂)께서 용꿈을 꾸고 율곡 선생을 낳으신 연유로 몽룡실(夢龍室)이라고 명명하였다고 합니다.
몽룡실(夢龍室)에는 신사임당(申師任堂) 영정이 모셔져 있습니다.
율곡 이이(栗谷 李珥) 선생의 어머니인 신사임당(申師任堂)은 성품이 어질고 착하며 효성이 지극하고 지조가 높았다고 합니다.
어려서부터 경문을 익히고 문장, 침공, 자수 뿐만 아니라 시문, 그림에도 뛰어나 우리나라 제일의 여류 예술가라 할 수 있으며 자녀교육에도 남다른 노력을 기울여 현모양처의 귀감이 되고 있습니다.
강릉 오죽헌 율곡매(江陵 烏竹軒 栗谷梅) - 천연기념물 제484호
이 나무는 1400년경 이조참판(吏曹參判)을 지낸 최치운(崔致雲)이 오죽헌을 건립하고 별당 후원(後園)에 심었다고 하며, 신사임당과 율곡선생이 직접 가꾸었다고 전한다.
사임당은 고매도(古梅圖), 묵매도(墨梅圖) 등 여러 매화그림을 그렸고 맏딸의 이름을 매창(梅窓)이라고 지을 만큼 매화를 사랑하였다.
사임당 당시 율곡매는 상당히 굵었을 것으로 보이며 본 줄기는 고사하고 곁가지가 자란 아들나무로 추정된다.
율곡매는 꽃 색깔이 연분홍인 홍매(紅梅)종류이며, 열매는 다른 나무에 비하여 훨씬 알이 굵은 것이 특징이다.
- 안내문에서 -
배롱나무
이 나무는 율곡선생 당시에도 있던 것으로 수령 600년이 넘습니다.
지금은 강릉시화(江陵市花)로 지정되어 있습니다.
문성사와 오죽헌(몽룡실-별채) 건물에서 안채와 사랑채로 통하는 중문
안채
사랑채(바깥채)
사랑채 기둥에는 추사 김정희 선생의 주련(柱聯) 10개가 있습니다.
운한문(雲漢門)
운한문(雲漢門)을 지나면 어제각(御製閣)으로 통합니다.
어제각(御製閣)
어제각(御製閣)은 율곡의 저서 "격몽요결(擊蒙要訣)"과 율곡이 유년기에 사용하였던 벼루를 보관하기 위한 유품소장각입니다.
1788년 정조 임금은 벼루와 "격몽요결(擊蒙要訣)"이 오죽헌에 보관되어 있다는 말을 듣고, 그것들을 궁궐로 가져오게 하여 친히 보았다.
그리고 벼루 뒷면에 율곡의 위대함을 찬양한 글을 지어 새기게 하고, 책에는 머리글을 지어 붙여 잘 보관하라며 돌려보냈다.
당시 임금의 명을 받은 강원도관찰사 김재찬(金載瓚)이 이를 보관하기 위하여 지은 집이 어제각(御製閣)이다.
- 안내문에서 -
율곡기념관(栗谷記念館)
율곡선생 행장기(栗谷先生 行狀記) 안내판
입지문(立志門)
입지문을 내려가면 강릉시립박물관과 향토민속관 등이 있습니다.
강릉 석불입상(고려시대 석불)과 보물 제86호 강릉 굴산사지 당간지주(崛山寺址 幢竿支柱)의 모형
장독대
신사임당 동상(銅像)
신사임당(申師任堂) 상(像)
申師任堂(신사임당 1504~1551)은 아명은 인선(仁善), 당호는 사임당(師任堂)으로 아버지 평산 신씨 신명화(申命和)와 어머니 용인 이(李)씨 사이에 태어난 다섯 딸 중 둘째였으며 외할머니와 어머니의 영향으로 유교경전과 문장, 글씨, 그림, 바느질과 자수에 능했다고 한다.
19세의 나이에 덕수 이(李)씨 원수(元秀)와 혼인하였으며 선과 매창, 번, 이, 우 등 4남 3녀의 자식을 두었는데, 셋째 아들이 율곡 이이(栗谷 李珥)다.
1551년 48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나 경기도 파주 두문리 자운산에 묻혔다.
신사임당 상(像)과 작품모형
踰大關嶺望親庭 (대관령을 넘으며 친정을 바라본다)
慈親鶴髮在臨瀛 (늙으신 어머님을 고향에 두고)
身向長安獨去情 (서울 길 홀로 떠나가는 이 마음)
回首北村時一望 (돌아보니 북촌은 아득도 한데)
白雲飛下暮山靑 (흰 구름만 저문 산을 날아 내리네)
詩 - 신사임당
신사임당 동상 건립에 관한 비문
향토민속관과 강릉시립박물관
강릉 단오제(江陵 端午祭) 행사와 강릉 농악 등 각종 민속
1910년대 강릉시 전경(왼쪽)과 2013년 강릉시 전경(오른쪽)
강릉의 유래
강릉시는 옛부터 예맥족이 살던 곳으로 고구려 미천왕 14년(313년)에는 고구려 세력에 합치게 되어 하서랑 또는 하슬라 라고 불리었다.
그후 신라 내물왕 때에 신라의 영역으로 되었으며, 경덕왕 16년(757년)에 명주라 하였고, 고려 충렬왕 34년(1308년)에 강릉부로 개칭되었다.
공양왕 때에는 강릉대도호부가 있어 원산에서 울진에 이르는 동해안 일대를 관할하였다.
조선시대에 들어 태조 4년(1395년)에 강원도로 개칭하였고, 고종 33년(1896년)에 강릉군으로 되어 21개 면을 관할하였다.
일제시대인 1931년에 강릉면이 강릉읍으로 승격되었으며, 대한민국 정부수립 이후인 1955년에 강릉읍, 성덕면, 경포면을 합하여 강릉시로 승격과 동시에 강릉군을 명주군으로 개칭· 분리하였다가, 1995년 1월 1일 강릉시, 명주군을 통합하여 통합강릉시로 개칭, 현재에 이르고 있다.
강릉 비석군(江陵 碑石群) - 강원도 문화재 자료 제48호
이 비석군은 조선시대 강원도의 관찰사, 강릉부사, 찰방으로 있던 관리의 선정(善政)을 기리기 위해 세운 여러 기념비를 모아 놓은 것이다.
충노 문리동 행적비(忠奴 文里同 行蹟碑) - 강원도 문화재 자료 제48호
문리동(文里同)은 조선시대 관노(官奴)이다.
임진왜란 때 전란을 피해 강릉부사 이광준(李光俊)을 모시고 산골로 들어갔다가 양식을 구하기 어려워지자 산에 흩어진 나락을 주워 연명하게 하는 등, 어려움 속에서도 정성을 다하여 부사를 섬겼다.
그의 행실을 갸륵히 여겨 이 비를 세웠다.
고인돌 하부구조 및 신라고분
금산리 고분(金山里 古墳)
강릉 병산동 주거지와 고분(古墳)
율곡인성교육관
어머니 길 표지석
인생길 - 노래 김서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