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경

운현궁

로제로제 2014. 11. 3. 03:44

왕실문화의 전당 - 운현궁(雲峴宮)



운현궁 이로당(二老堂)에서 후원으로 통하는 문

 




운현궁(雲峴宮) - 사적 제257호(1977년 11월 22일 지정)

운현궁(雲峴宮)은 흥선대원군 이하응(李昰應)의 사저(私邸)로 그의 둘째 아들인 고종(高宗:재위 1863∼1907)이 출생하여 12세에 왕위에 오르기 전까지 성장한 잠저(潛邸)이다. 운현(雲峴)이란 조선시대 서운관(瑞雲觀, 후에 관상감으로 개칭) 앞의 고개를 가리키는 이름으로 저택이 위치한 지명에서 비롯된 것이며, 고종이 즉위하면서 임금의 잠저라는 이유로 ‘궁(宮)’의 명칭을 받게 되어 ‘운현궁(雲峴宮)’이라 불리게 되었다. 이때부터 운현궁은 확장, 증축되기 시작하여 고종이 즉위한 이듬해(1864)에 노락당(老樂堂)과 노안당(老安堂)이 준공되었고, 1870년에 이로당(二老堂)이 완공되었다.

이 무렵에는 아재당(我在堂)과 할아버지 은신군(恩信君)과 아버지 남연군(南延君)을 모시는 사당을 포괄하며 건물을 두르는 담장 둘레가 몇 리에 이르는 규모였다. 여기에 그치지 않고 창덕궁과 운현궁의 편리한 왕래를 위해 임금 전용의 경근문(敬謹門)과 흥선대원군 전용의 공근문(恭勤門)이 세워지기도 했으니, 당시 흥선대원군의 위세와 저택의 규모는 가히 왕과 궁궐에 비길 만했다고 한다.



노안당(老安堂)으로 들어가는 중문



노안당(老安堂)

운현궁의 사랑채인 노안당은 대원군이 거처했던 곳으로 홑처마의 정면 6칸 측면 2칸 규모인데, 민가에서는 그 예가 드문 세벌대 장대석 기단 위에 놓여 있다. 전체가 T자형 구조로 우측의 남쪽으로 돌출한 부분은 영화루(迎和樓)라는 2칸짜리 내루이다. 벽체는 모두 이분합 또는 사분합으로 되어 있어서 한여름에 찾아가면 그 기능과 미감을 한눈에 확인할 수 있다. 외벽을 꽃담으로 장식하여 건물의 격조를 높였으며, 현재까지 잘 관리되어 윤기가 흐르는 마루가 일품이다. 넓었던 사랑채 마당은 과거의 영화와 함께 떠나가고 지금은 담으로 막힌 좁고 답답한 형식적 공간으로 남아 있을 뿐이다. 노안당 편액은 추사의 글씨를 집자해서 만든 것이다.



난(蘭)을 치고 있는 흥선대원군

난(蘭)은 그리기 어려운 소재라고 하는데 석파(, 흥선대원군 이하응)는 아들이 왕(王)이 되기 전인 야인시절에 난(蘭)그림을 팔아서 궁핍한 생활에 보탬이 되었다는 일화가 전해질 정도로 난(蘭)그림에 조예가 깊었다고 합니다.




봉사식

고종의 봉사식은 흥선대원군(興宣大院君)의 아들을 왕으로 정하는 교서를 받는 의식으로 영의정과 도승지가 참여한 가운데 치러졌다. 고종은 복건(幅巾)에 청도포(靑道袍)를 입고 백사대(白紗帶)를 착용하였다. 흥선대원군은 흑단령(黑團領)을, 영의정 김좌근은 조복(朝服)을, 도승지 민치상은 청단령(靑團領)을 착용하였다.




천하장안

천하장안(千河張安)은 흥선대원군(興宣大院君)이 야인시절 파락호(破落戶)로 위장하여 살아갈 때부터 시중을 들던 사람들로 천희연(千喜然)· 하정일(河靖一)· 장순규(張淳奎)· 안필주(安弼周) 등 네 명의 성을 따서 천하장안으로 불리게 되었다. 이들은 흥선대원군의 개인 경호부터 정보를 수집하는 일까지 도맡아 했다고 한다. 천하장안 중 한 명인 천희연이 창의(氅衣) 위에 청색 호의(號衣)를 착용하였다.



노락당(老樂堂)으로 들어가는 중문(中門)



노락당(老樂堂) - 외국 여성관광객들이 한복체험을 하면서 즐거워 하고 있다.


운현궁의 안채인 노락당(老樂堂)은 운현궁의 중심 건물로 이곳에서 고종 3년(1866) 15세의 고종이 당시 16세이던 명성황후 민씨와 가례를 올렸다.

노락당 뒤편은 단순한 창살들의 조화가 아름다운 공간이다.



한복체험 중인 외국관광객... 머리에 보자기를 쓴 걸로 보아 이슬람교를 믿는 여성들인 듯... 



노락당(老樂堂)



부엌일을 하는 상궁의 당의와 나인의 저고리, 치마

고종이 왕위에 오른 뒤 상궁과 나인들이 운현궁에 배치되어 살림을 도왔다.

상궁은 녹색당의를 입었고 나인은 살구색 저고리에 청치마를 착용하고 앞치마를 둘렀다.



노락당 부엌




명성왕후의 부대부인 생신 축하방문

일반적으로 왕비는 궐 밖 출입이 자유롭지 않았는데 부모의 생신(生辰), 병문안(病問安), 상(喪) 등의 제한적인 경우에 사가를 방문할 수 있었다. 명성황후(明成王后)가 부대부인(府大夫人)의 생신을 맞이하여 세자를 데리고 운현궁(雲峴宮)을 방문하여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있다. 명성왕후는 당의를 착용하였고 부대부인은 평상복인 치마, 저고리에 마고자를 착용하고 있다. 세자는 오방장 두루마기 위에 사규삼을 착용하였고 대원군의 손자인 이준용은 오방장 두루마기 위에 전복을 착용하였다.



낙성식(落成式) 축하 다례연(茶禮宴)

고종이 왕위에 오른 후 운현궁(雲峴宮)을 대대적으로 보수, 증축하였다. 고종1년(1864년) 9월 노안당(老安堂)과 노락당(老樂堂)의 낙성식이 성대하게 거행되었다. 조대비(趙大妃)와 철종비(哲宗妃)가 궁중 소례복인 보(補)를 부착한 당의를 착용하고 부대부인(府大夫人)과 함께 노안당과 노락당의 낙성을 축하하며 담소를 나누고 있다.



떡메






다듬잇돌과 다듬잇방망이



노락당에서 이로당으로 통하는 쪽문



노락당 뒤편



이로당 들어가는 문



이로당(二老堂)

이로당은 대원군의 부인인 부대부인 민씨가 운현궁의 살림을 맡아하던 곳으로, 명성황후도 이곳에서 궁중 법도를 익혔다고 한다. 바깥으로는 출입문이 없고 노락당과 복도로 연결되어 안채에서만 드나들 수 있는 구조로, 정면 7칸 측면 7칸의 홑처마 팔작지붕이며 전체가 폐쇄적인 ㅁ자형 구조이며 내부는 쪽마루로 이어져 있다.

운현궁의 안채로 다른 민가 건축에서는 그 예를 찾아볼 수 없는 네 벌대 기단 위에 자리하고 있어 운현궁 안주인의 위상을 엿볼 수 있다.



운하연지(雲下硯池)

이로당 앞 왼쪽의 물을 담아두던 '확'... 요즘으로 치면 방화수(防火水)를 담아 두던 일종의 소방설비



이로당(二老堂)



이로당 내부



마루는 반질반질하게 윤기가 흐르고...






운현궁 내의 각 건물 추녀에는 햇볕을 가리는 차양효과와 비바람에 비가 들이치는 것을 막기위하여 나무판자에 구리판을 덮은 보첨을 달았는데 이 보첨은 필요에 따라 붙였다 떼었다를 할 수 있도록 되어 있다고 합니다. 



뒤뜰에는 아직도 물을 길어 올릴 수 있을 것 같은 우물이 있고...



무승대(茂承臺)

난(蘭)을 유난히 좋아했던 흥선대원군은 밤이 되면 난 화분을 돌 받침대인 이 무승대(茂承臺)에 올려놓았다고 합니다.


뒤로 보이는 석벽은 석빙고(石氷庫)로 음식을 차게 보관하는 시설이었다고 합니다.



요거석(燎炬石 - 횃불 받침석)



경백비(慶栢碑)

이 비는 고종이 어린 시절 이 자리에 있던 잣나무 아래서 휴식을 취하기도 하고 타고 오르며 놀았던 고마움을 잊지 못해 왕위에 오른 후, 나무에게 2품의 품계를 하사했다는 사연이 있습니다.






담쟁이 덩굴도 고운 색으로 깊은 가을임을 알리는데...



유물전시관앞의 석물...  돌 횃불받침대



운현궁 내의 유물전시관



흥선대원군(興宣大院君) 이하응(李昰應)의 초상화



궁궐보다 더 큰 권세를 누렸던 집...

궁궐은 아니었으나 궁궐보다 더 큰 위세를 누렸던 집...


운현궁은 흥선대원군의 정치적 거점이었으며, 조선 말기 이 땅에 들어온 외국 세력에게는 조선 정치의 상징적 공간으로 인식되어 많은 사건의 중심에 놓였던 곳이다.

원래는 궁궐에 견줄 만큼 크고 웅장하였다고 하며, 대원군이 즐겨 쓴 아재당(我在堂)은 없어지고, 한옥은 사랑채인 노안당(老安堂), 안채인 노락당(老樂堂)과 별당채인 이로당(二老堂)만이 남아 있다.

또한 대원군의 할아버지 은신군(恩信君)과 대원군의 아버지인 남연군(南延君)의 사당(祠堂)도 있었으며, 고종이 창덕궁(昌德宮)에서 운현궁을 드나들 수 있는 경근문(敬覲門)과 대원군 전용의 공근문(恭覲門)이 있었으나 모두 헐리고 없어졌다.






친영례 복식

고종과 명성왕후의 가례(嘉禮) 중의 친영례.

고종은 면복(冕服)을, 명성왕후는 적의(翟衣)를 입었으며 흥선대원군(興宣大院君)은 조복(朝服)을, 부대부인(府大夫人)은 원삼(圓衫)을 입었다.





나전칠기함



홍이포와 화승총






상궁의 청녹색 당의 명성왕후의 홍색 노의






참고:

1. 운현궁의 양관은 본래 대원군의 손자인 이준(李埈)의 저택으로 1912년 무렵에 건립되었는데, 1917년 이준이 죽은 뒤 순종(純宗)의 아우인 의친왕(義親王)의 둘째아들 이우가 이어받았으나 지금은 덕성여자대학교의 건물 일부로 쓰이고 있습니다.


2. 운현궁 안의 수직사 건물은 흥선대원군의 수하들이 거처하던 곳인데 지금은 보수작업 중에 있습니다.




정다운 이들과의 즐거운 만남... 반갑고 기뻤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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