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탑골공원
서울 탑골공원 (사적 제354호 1991년10월25일 지정)
위치: 서울특별시 종로구 종로 99 (종로2가)
탑공원· 탑동공원이라고도 하며 서울 최초의 근대공원이다.
이전에는 파고다공원이라 했으나, 1991년에 옛 지명을 따 탑골공원이라 개칭했다.
고려 때는 흥복사가 있었으며, 1464년에 원각사라 개칭하여 도성 안 제일의 사원으로 중건했다.
조선시대 억불정책이 강화됨에 따라 중종 때 원각사 건물이 모두 헐리고 빈 터만 남았다.
2011년 7월 28일 '서울 탑골공원'으로 명칭이 변경되었다.
1919년 3·1운동 당시 시내 청년학도와 애국시민이 이곳 파고다 공원에 모여 학생 대표의 독립선언문 낭독에 이어 대한독립만세를 외치고 시위를 벌인 민족해방운동의 발상지로 의미가 깊은 곳이다.
1890년대에 탁지부(度支部-'도지부'라고 읽으면 잘못임) 고문이었던 영국인 J. M. 브라운의 건의에 의해 서울 최초의 공원으로 조성되었다고 알려져 있다.
우리나라 최초의 근대식 공원은 1888년에 개원한 인천의 만국공원(인천 자유공원)이 우리나라 최초의 공원이며, 탑골공원은 서울 최초의 공원이다.
탑골공원의 정문인 "삼일문"
원래 탑골공원 삼일문에는 광복 직후 서예가 김충현 씨가 쓴 현판이 걸려 있었다가 1967년 박정희 전 대통령이 쓴 현판을 달았다.
그러나 2001년 '3·1 운동의 발상지인 탑골공원에 일본군 장교 출신이 쓴 현판을 걸 수 없다'며 뜯어냈으며, 이에 서울시 종로구는 그동안 서울시 및 문화재청과 현판 재설치에 관해 협의하여 2003년 2월 가로 1.2m, 세로 0.9m로 기존 것과 동일한 크기의 현판을 새로 제작하여 달았다.
현판의 글씨체는 '삼'자와 '일'자는 독립 선언서의 글자를 그대로 사용했고 선언서에 없는 '문'자는 다른 글자의 자음과 모음을 조합해 만들었다.
탑골공원에는 이 삼일문(정문) 외에도 동문, 서문, 북문의 3개의 문이 더 있습니다.
탑골공원 안내도
1991년에 공원명칭을 파고다 공원에서 탑골공원으로 개정하였고 2011년 7월에 '서울 탑골공원'으로 정했다.
일반적으로는 흔히 '탑골공원'이라고 부른다.
공원 내에는 독립운동 봉화에 불을 당겼던 팔각정을 중심으로 원각사지 10층석탑(국보 제2호)· 대원각사비(보물 제3호) 등의 문화재와 3·1운동 기념탑, 3·1운동 기념 부조, 의암 손병희 동상, 한용운 기념비 등이 있다.
도심의 휴식처인 서울 탑골공원
고려시대에는 흥복사(興福寺)라는 사찰이 있었던 곳으로 1464년(세조 10) 불교에 대한 신앙심이 깊었던 세조가 원각사(圓覺寺)로 개명하고 중건하였는데, 근처의 가옥 200여 호를 철거하여 3년 후에 완공된 사찰의 규모는 굉장한 것이었고 도성 안 제일의 대가람이었다.
원각사는 당우나 문루의 규모도 대단한 것이었지만, 특히 전국에서 동 5만 근을 모아 주조한 대종(大鐘)과 1468년에 완성하여 그 안에 석가여래의 분신사리와 새로 번역한 원각경을 안치한 10층 석탑이 있었다.
비교적 숭불정책이 시행되던 것이 성종 때 들어와서는 철저한 억불정책으로 바뀌었고, 그것은 연산군 대(代)에 들어와서는 더욱 가혹하여졌다.
원각사를 철거하자는 논의는 1504년(연산군 10)에 시작되었지만 당장에는 철거하지 않았고, 그 대신 기생과 악사를 관리하는 장악원(掌樂院)을 이 자리에 옮겨 전국에서 뽑아 올린 기생 1,200여명과 악사 1,000명, 감독 40명이 기거하는 연산군의 기생방이 되었으며, 그 이름도 연방원(聯芳院)으로 바뀌었다.
연산군이 쫓겨난 뒤 원각사의 건물은 잠시 한성부 청사의 일부로 사용되기도 하였다.
그러나 1514년(중종 9) 호조(戶曹)에서 원각사를 헐어 그 재목을 여러 공용건물의 영선에 쓸 것을 계청하자, 왕이 이를 허락한 뒤 얼마 안 가서 이 사찰 건물은 그 자취를 감추어 버렸고, 대원각사 비(大圓覺寺 碑)와 10층 석탑만 남게 되었다.
물론 옛날의 사찰 터의 규모에 비하면 현재는 엄청나게 줄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의암 손병희 선생 동상
의암 손병희(1861년 - 1922년) 선생
천도교 제3세 교주. 독립운동가. 교육사업가.
호는 의암. 충청북도 청원 출생.
3.1만세운동 때 민족대표 33인의 필두로서 3.1독립선언을 주도.
3·1운동기념탑
독립선언서
선언서(宣言書)
사진의 선언서(宣言書)는 1919년 3월 1일에 3·1 독립운동 당시 이곳 탑골공원 팔각정(八角亭)에서 서명한 33인의 민족대표가 낭독(朗讀)하고 배포(配布)했던 기미독립선언서(己未獨立宣言書)이다.
이 선언서는 충청남도 천안시 독립기념관에 소장(所藏)· 전시(展示)하고 있는 것을 관람객이 보기 쉽게 4배 크기로 확대한 모사본(模寫本)이다.
서울 탑골공원 팔각정 - 서울특별시 유형문화재 제73호(1989.09.11 지정)
팔각정은 1902년(광무 6)에 탑골공원 안에 지은 팔각형 정자다,
이곳은 1919년 3월 1일 탑골공원에서 시작된 3,1운동 당시 독립선언서를 낭독한 곳이다,
전통과 근대의 건축기술을 두루 사용했던 도편수 심의석(沈宜碩 1854-1924)이 주도하여 공사를 진행하였다,
1956년 파고다공원(당시 명칭) - 자료 사진
탑골공원 안의 수국
서울 원각사지 십층 석탑 (圓覺寺址 十層 石塔) - 국보 제2호
이 탑은 세조(世祖)가 세운 원각사(圓覺寺) 터에 남아 있는 높이 12m의 십층 석탑이다.
원각사는 1465년(세조 11)에 조계종의 본산이었던 흥복사(興福寺) 터를 확장하여 세운 사찰인데, 이 탑은 2년 뒤인 1467년(세조 13)에 완성했다.
세조는 사리분신(舍利分身)하는 경이로운 일을 겪은 뒤 원각사를 짓기로 결정하였는데, 공사 도중에도 사리분신하고 서기(瑞氣)가 나타났다고 전한다.
지금 견해로는 십층 석탑이지만 사료(史料)에는 13층의 탑[窣覩婆 솔도파]을 세워 분신사리와 새로 번역한 <<원각경(圓覺經)>>을 모셔 두었다고 한다.
아(亞) 자 모양의 기단은 세 겹인데, 아래에는 용과 연꽃 같은 무늬를 새겼고, 중간에는 삼장법사(三藏法師)와 손오공, 저팔계, 사오정 일행이 인도에서 불법(佛法)을 구해 오는 과정을 그려 새겼다.
위에는 부처님의 전생 설화와 일생을 조각하였다.
법회 장면을 새긴 탑의 몸체에는 현판, 용을 휘감은 기둥, 목조구조, 지붕을 두었는데, 마치 하나의 건물 같다.
탑을 만든 재료는 흔치 않은 대리석이며, 독특한 형태와 조각 솜씨는 조선시대 석탑의 백미로 꼽힌다.
이 석탑은 고려 시대에 제작한 경천사 십층 석탑(국보 제86호)과 여러 면에서 매우 비슷하다.
1919년 3월 1일 일제에 항거하는 독립만세운동이 탑골공원에서 일어나자 일제는 이에 대한 복수로 탑을 일본으로 반출하려는 시도를 하면서 실제로 탑 상층부 3개 층을 내렸으나(사진 참조), 결국 가져가지 못했고 그대로 방치된 채 광복을 맞았다.
유리 보호각을 씌우기 전 모습
광복 후 미 군정청(美 軍政廳)의 문교부 교화국 담당으로 있던 크네츠비치가 미군의 공병부대를 동원해 1946년 2월 원상으로 복구해 놓았다.
이 크네츠비치는 6ㆍ25전쟁 당시 국립중앙박물관의 유물 2만여 점을 부산으로 옮기는데 결정적인 공헌을 한 사람이기도 하다.
이 탑의 모델이 된 개성 경천사지 십층석탑(국보 제86호)은 국립중앙박물관 1층 실내에 보존돼 있다.
탑(塔)이 비둘기 배설물, 산성비 등의 원인으로 부식이 심해지자 보호를 위해 2000년에 지금과 같은 유리 보호각을 씌웠다.
달성(達城) 소나무 삼형제 중의 한 그루
2013.10.22
대구광역시 달성군
명예달성군민 방송인 송 해 기증
3·1 운동 기념 부조(浮彫)
3·1 운동 기념 부조(浮彫)
총 10개의 부조상(浮彫像)이 있습니다.
3·1 운동 기념 부조(浮彫)
3·1 운동 기념 부조(浮彫)
3·1 운동 찬양비
동문(東門)
현재는 사용하지 않는 것 같아 보였습니다.
용운당 대선사 비 (龍雲堂 大禪師 碑)
만해(萬海) 한용운(韓龍雲 1879. 8. 29 ~ 1944. 6. 29) 스님을 기리는 비(碑)
탑골공원 안의 꽃
대원각사 비(大圓覺寺 碑) - 보물 제3호 시대: 1471년(성종 2)
대원각사비(大圓覺寺碑)는 1471년(성종 2)에 세조(世祖)가 원각사를 창건한 경위를 적어 세운 비석이다.
불심이 돈독했던 세조는 양주 회암사에서 분신(分身)한 사리를 보고 감동하여 1465년(세조 11) 흥복사(興福寺) 터에다 원각사를 지었다.
이어 1467년(세조 13)에 13층 석탑이 완성되자 연등회를 열고 낙성식을 거행하였으며 그 전후사정을 적은 비석을 조성하게 하였다.
거북이 모양의 받침돌을 만들고 그 등 위에 연잎을 새겨 비석 몸돌을 세울 자리를 만들었다.
몸돌은 머릿돌인 이수(螭首)와 한 돌로 만들었다.
비석의 전체 높이는 494cm이며 거북은 화강암으로, 몸돌과 머릿돌은 대리석으로 만들었다.
당대 문장과 글씨로 이름난 사람들이 비문을 맡았다.
김수온(金守溫)이 앞면의 글을 짓고, 성임(成任)이 그 글을 썼으며, 서거정(徐居正)이 뒷면의 글을 짓고, 정난종(鄭蘭宗)이 그 글을 썼다.
연산군 대 궁궐에 인접한 민가를 철거하면서 원각사는 빈 절이 되었다.
근대에 들어 공원으로 변모한 이곳에는 십층석탑(국보 제2호)과 이 비석만 남아 원각사의 옛 흔적을 보여 주고 있다.
- 안내문에서 -
보호각을 세우기 전 모습
1997년에 비둘기 등 조류의 배설물과 산성비 등으로 대리석 재질인 비(碑)의 문자와 조각이 더 이상 부식되는 것을 막기 위해 17평 규모 전통양식의 보호각을 세웠다.
발굴출토 우물
2001년 탑골공원 재정비(성역화) 사업으로 서울역사박물관에서 시행한 시굴조사 때 발견된 우물 가운데 하나이다.
발견 당시, 우물 내부는 바닥까지 모래와 마사토로 채워져 있었기 때문에 일시에 폐기된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안에서 일본 동전과 상평통보, 일본산 맥주병 등이 발견되고, 벽돌을 사용한 점, 그리고 축조방법으로 미루어 보아 조선말기(대한제국기)에 조성한 뒤 일제강점기까지 사용된 우물로 판단된다.
서울 4대문 안에서 민간용 우물이 발견된 사례가 드물어 이 우물은 조선후기 한양의 생활사 연구에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탑골공원 내에 모아둔 여러 석물들은 이 일대의 도시개발과정에서 출토된 부재들이다.
이 중 대리석으로 된 인물상(3점)은 원각사 탑(圓覺寺 塔)의 주위를 호위하던 신장상(神將像)이거나 보살상(菩薩像)으로 추정되고, 연화문(蓮花紋)이 새겨진 난간석(欄干石)은 원각사 탑 외곽을 둘렀던 부재가 아닌가 여겨진다.
“복청교(福淸橋)”라고 음각된 교명주(橋名柱)가 보이는데, “복청교”는 원래 교보문고 뒤편인 광화문우체국 북측지점에 있었던 혜정교(惠政橋)인데, 탐관오리를 공개적으로 처형하던 다리로써 중학천(中學川)이 청계천으로(淸溪川)으로 합류하기 전의 중학천 하류에 걸쳐져 있었다.
일제강점기(1926)에 혜정교를 개축하면서, 다리이름을 「복청교」라고 개명(改名)하며 만든 교명주로 보인다.
나머지의 여러 석재들은 도성 내에 가설되어 있었던 옛 돌다리의 부재(귀틀석 16점, 멍에석 1점, 엄지기둥 1점 등)들이 대부분이다.
현재 이곳에 모아둔 각종 석물들은 출처를 정확히 알 수 없는 형편이나, 전통석조물 연구에 귀중한 자료가 되고 있다.
- 안내문에서 -
탑골공원은 주로 나이 많으신 분들의 쉼터가 되고 있습니다.
도심의 휴식처, 서울 탑골공원
나이테 사랑 - 노래 이나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