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각산(三角山) 금선사(金仙寺)
금선사 연화당의 창호는 입체감 있는 아름다운 꽃살 문양과 화려한 색감을 자랑하고 있습니다.
금선사(金仙寺) 입구로 올라가는 길은 서울 종로구 비봉길(옛 구기동)에 있습니다.
저 바위가 두꺼비 바위랍니다...
누가 요런 귀여운 짓을 ...??
금선사의 템플스테이는 2014년에 최우수 운영사찰로 선정되었다고 합니다.
길이 아름다워서...
금선사(金仙寺) 목정굴(木精窟) 가는 길...
금선사(金仙寺) 관음성지 목정굴(木精窟) 안내글
무무문(無無門)
가운데 무(無) 자(字)는 행서체로 쓰여서... 일반인은 얼른 알아보기 어려워요.
전체의 뜻은 "아무 것도 없는 문" 이라는 뜻이라네요.
목정굴(木精窟)은 자연동굴을 석굴로 개조한 굴법당으로서 조선 23대 순조의 탄생 설화가 서려있는 곳으로 여름에 수량이 많을때는 왼쪽 바위에 거대한 폭포가 형성되어 흘러 내린다고 합니다.
수월관음 보살상 ( 水月觀音菩薩像)
석굴 내부에는 4평 정도의 소규모로 마루를 깔아 법당의 모습을 갖추고
암벽을 배경으로 육각대좌 위에 석조 수월관음보살상(水月觀音菩薩像)을 봉안하였는데,
무더운 여름에 오면 피서가 따로 없을 정도로 시원하다고 하며,
석굴 천정과 구석에서 흐르는 물소리가 음악처럼 들려 온다고 합니다.
석굴을 나와서
반야전(般若殿)
반야전 내부 모습
가운데 석가모니불 왼쪽 지장보살 오른쪽 관세음보살
해탈문 (解脫門)
해탈문 뒤로 보이는 돌계단이 108계단입니다.
108계단을 오르면 금선사의 가장 높은 곳에
위치한 대적광전(大寂光殿)과 삼성각(三聖閣)에 이르게 됩니다.
오늘이 소한... 다 얼었어요.
청와대와 경복궁이 위치한 인왕산이 바라 보이는 삼각산의 아름다움을 병풍으로 한 금선사의 창건 역사를 보면,
고려말~조선초의 고승이며 태조 이성계의 왕사 무학자초(無學自招)대사가
조선왕조의 도읍을 정하고자 삼각산을 살피던 중에 지금의 절터에 정기가 서려있음을 느끼고
사찰을 창건하면서 그 이름을 금선사(金仙寺)라 하였다고 합니다.
금선사 신중도(金仙寺 神衆圖) - 서울시 유형문화재 제161호
신중도는 하늘을 다스리는 천신(天神)[제석천(帝釋天) 범천(梵天)]과 불법 수호의 신중 무리를 그린 불화로서 조선 후기 이후에 널리 유행하였다.
김선사 신중도는 고종 24년(1887)에 그려진 그림으로 화면 아래쪽에 '신중탱'이라는 명호가 보이는 그림에 대한 기록이 남아 있다.
금선사 신중도 안내문
대적광전 (大寂光殿)
금선사 대적광전 내부
비로자나불(毘盧遮那佛)을 중심으로 좌우에 노사나불(盧舍那佛)과 석가모니불(釋迦牟尼佛)입니다.
삼성각 (三聖閣)
삼성각 내부
독성(獨聖), 칠성(七星), 산신(山神) 등의 삼성(三聖)이 탱화로 봉안되어 있어요.
삼성각 옆을 흐르는 계곡에 세워진 무지개다리인 홍예교(虹霓橋)입니다.
홍예교 다리를 건너면 계곡 옆으로 멋들어진 커다란 바위가 있고
바위 아래 쪽에는 북한산의 옥수(玉水)가 졸졸 흘러나오는 물맛 좋은 약수터가 있습니다.
적묵당의 맞은편에는 2층 건물인 미타전(彌陀殿)과 연화당(蓮華堂)이 서있습니다.
1층은 영가들의 유골과 위패를 봉안하는 추모시설인 연화당(蓮華堂)이며,
2층은 아미타여래상과 지장보살, 관세음보살을 모신 법당인 미타전(彌陀殿)입니다.
날씨도 추운데 새싹이...아직은 아니여!...
범종각 (梵鐘閣)
일주문에는 "三角山金僊寺(삼각산금선사)"라는 편액이 걸려 있는데
학정 이돈흥(鶴亭 李敦興) 선생의 글씨라고 합니다.
그런데 자세히 보면 절의 이름인 "金仙寺"가 아니라, "金僊寺"로 되어 있습니다.
이는 서예가의 재치인 것 같습니다. 금선(金仙)이란 부처님을 칭하는 다른 이름이며
같은 말로는 대선(大仙)과 금선(金僊)이 있는데, 금선(金仙)과 금선(金僊)은 통용되고 있습니다.
동자석(童子石)
창건이래 많은 선지식들이 주석했으며 조선 중후기 정조대왕의 원찰로서 수행자와 기도객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 명찰이었으나,
일제 강점기 시절에 소실되었던 것을 1955년에 도공(道空) 스님께서 중건하였으며,
지금의 면모를 갖추게 된 것은 현 주지인 법안(法眼)스님이
목정굴을 복원하면서 미타전, 연화당, 삼성각, 대적광전, 반야전, 적묵당, 일주문 등을 중창하였습니다.
조선시대 숭유억불정책에 살아남기 위한 기복의 전파였지만 용파스님, 농산스님의 기도와 환생으로
순조임금이 탄생한 설화가 전하면서 그 덕으로 금선사는 천년 가까운 맥을 이어오고 있습니다.
간식 먹고 ...
족두리봉
비봉으로 잠시 올라 가다가 다음 기회에... 올라가야지?
바위가 멋있어요...
금선사에서 내려 와서 아구찜 먹으러 용광동으로...
아구찜도 맛있고 코다리찜도 정말 맛있었어요!
대비마마 님... 아주 맛있게 잘 먹었어요... 고마워요...
햇님아우님! 짱구아우님! 너무나 고마웠어요.
토정 이지함 선생하면... 예전에 노인네들이 들여다 보던 "토정비결" 생각이...
토정 이지함은 옛날에 여기 마포구 토정동(현재는 토정로)에 움막을 짓고 살았다고 합니다.
토정 이지함 (土亭 李之菡 1517 ~ 1578)
토정 이지함은 조선 중기의 학자· 문신· 기인(奇人).
역학, 의학, 수학, 천문, 지리에 해박하였으며, 농업과 상업의 상호 보충관계를 강조하고 광산 개발론과 해외 통상론을 주장하였다.
진보적이고 사상적 개방성을 보여준 인물로, 당시 반상의 구분이 엄격했던 조선사회의 맨 밑바닥으로 내려간 실천가였다.
토정 이지함은 시대를 앞서 백성구제와 구구의 방략 등 3대 부고론(도덕· 인재· 백용)을 외친 경세가이자 조선 최초의 양반 상인이었다.
토정 이지함의 <3대 부고론>
첫째, 도덕 부고론
사대부들이 마음의 욕심을 버리고 수기치안하여 도덕을 지키면 백성은 경제활동에 힘을 쏟을 수 있다.
따라서 재물은 풍족해지고 그 재물이 균분되어 민생은 윤택해지고 이상적인 대동사회가 된다.
둘째, 인재 부고론
어느 때에도 인재가 없었던 적은 없으나 인재를 적재적소에 바르게 배치하지 못했기 때문에 제도가 순기능을 발휘하지 못한다.
셋째, 백용(산업) 부고론
육지와 바다는 이랙 가지로 소용되는 물산을 저장한 창고이다.
이 창고에서 나오는 은· 옥· 물고기· 소금 등을 헐벗고 굶주리는 백성 누구나 생산하도록 하자는 것이다.
- 안내문에서 -
“귀한 소금 받아 가시구려”
(토정 이지함의 구휼활동 재현)
토정 이지함은 맨손으로 바다와 갯벌, 무인도를 이용하여 2~3년 만에 몇 만 섬의 곡식을 쌓았다.
그는 직접 지은 토정(土亭) 옆에 곡식을 쌓아놓고 굶주린 백성들, 특히 부녀자와 노인, 아이들에게 골고루 나눠주었다.
토정 이지함은 토정을 근거지로 삼고 무궁무진한 바다와 땅을 이용해 생업을 만들어 백성들에게 자립의 길을 열어주고 굶주린 배를 채울 수 있다는 사실을 몸소 보여준 조선 최초의 양반 상인이자, 실학의 선구였다.
강아지도 소금 받으러 왔는데... 누군가가 동전을 적선하셨네요... ㅎㅎㅎ
언제나 처음인것 처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