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경

서울 4대문 이야기

로제로제 2014. 11. 25. 01:24



서울 성문과 보신각


서울(한양)의 4대문과 보신각은 오행(五行)사상에 따라 세워졌습니다.



음양오행사상 중의 오상(五常)

동쪽은 청(靑)색이며 봄(春)이고 인(仁)이다 - 흥인지문(興仁之門) - 동대문

서쪽은 백(白)색이며 가을(秋)이고 의(義)다 - 돈의문(敦義門) - 서대문

남쪽은 적(赤)색이며 여름(夏)이고 예(禮)이다 - 숭례문(崇禮門) - 남대문

북쪽은 흑(黑)색이며 겨울(冬)이고 지(智)다 - 홍지문(弘智門) 

중앙은 황(黃)색이고 한여름(季夏)이며 신(信)이다 - 보신각(普信閣)



인(仁), 의(義), 예(禮), 지(智), 신(信)은 오상(五常)이고

청(靑)색, 백(白)색, 적(赤)색, 흑(黑)색, 황(黃)색은 오방(五方)색입니다.



서울의 성문 이름의 연유와  동양사상

유교사상이 국가경영의 기본이념이었던 조선은 “인(仁) 의(義) 예(禮) 지(智) 신(信)”의 ‘오상(五常)’을 중요한 덕목으로 여겼다.

도성의 문에 “인(仁) 의(義) 예(禮) 지(智)”의 네 가지 덕목이 포함된 이름과 함께 한양 도성내의 중앙부가 되는 자리에 종각(종루)을 세우고 “신(信)”의 덕목을 넣은 보신각(普信閣)에서 울려 퍼지는 종소리로 국가통치의 이념을 새겼다.

- 종합 자료참조 -



흥인지문(興仁之門) -  보물 제1호 (일명 동대문)

서울 성곽은 옛날 중요한 국가시설이 있는 한성부를 보호하기 위해 만든 도성(都城)으로, 흥인지문은 성곽 8개의 문(4개의 대문과 4개의 소문) 가운데 동쪽에 있는 문이다.

흔히 동대문이라고도 부르는데, 조선 태조 7년(1398)에 완성하였다가 단종 원년(1453)에 고쳐지었고, 지금 있는 문은 고종 6년(1869)에 새로 지은 것이다.

바깥쪽으로는 성문을 보호하고 튼튼히 지키기 위하여 반원 모양의 옹성(甕城)을 쌓았는데, 이는 적의 공격을 효과적으로 막기 위한 구조의 시설이다.

흥인지문은 도성의 8개 성문 중 유일하게 옹성을 갖추고 있으며, 조선 후기 건축 양식을 잘 나타내고 있다.  



흥인지문(興仁之門)

흥인지문은 다른 문과는 달리 네 글자로 되어있는데 그 이유는 풍수상으로 볼 때, 서울의 동쪽이 서쪽 인왕산에 비해 허(虛)하므로 이를 보강해주기 위해 옹성을 두르고 이름도 네 글자로 보강한 것이라고 합니다.


참고: 흥인지문(동대문)은 현재 공사 중이라서 사진촬영이 불가합니다.





1900년대 초경의 돈의문 모습.


돈의문(敦義門) - 별칭: 서대문(西大門)

1396년(태조 5년) 서울성곽 축조 당시 함께 건립됐으나 임진왜란 때 불에 타서 1711년(숙종 37년) 재건됐다.

서울 성곽의 4대문(四大門) 가운데 서쪽 큰 문으로 일명 "서대문(西大門)" 이라고도 했고 새문, 신문(新門)이라고도 했다고 한다.

지금의 신문로(新門路)라는 지명도 여기에서 유래했다. 

일제 강점기인 1915년 도시계획 및 전차궤도 복선화사업을 이유로 조선총독부에 의해 철거되어 지금은 그 흔적조치 찾을 길이 없다.

다만 원래 자리는 경희궁터에서 독립문 쪽으로 넘어가는 고갯길쯤에 있었을 것으로 짐작된다.

돌 축대 한 가운데에 위쪽을 반원형으로 두른 홍예문(虹霓門)을 큼지막하게 내어 도성의 출입을 가능하게 하였다.



돈의문 현판

현재 남아있는 돈의문 편액은 1915년 철거될 때까지 문루에 있던 것이라고 합니다.

뒷면에 음각되어있는 내용을 통해, 글씨는 1711년(숙종 37년) 돈의문을 중건할 때 조윤덕이 썼고, 1749년(영조 25년)에는 편액을 고쳐 만든 사실이 확인된다고 합니다.

1749년(영조 25년)에 고쳐 만들어져 일제강점기인 1915년 돈의문이 철거되면서 사라졌던 돈의문 현판이 2010년 국립고궁박물관 수장고에서 발견되어 2014년에 개관한 한양도성박물관에서 공개되고 있습니다.



몇 년 전(오세훈 전 서을시장 당시 2009년)에 서울시에서 돈의문(서대문) 복원계획을 발표하였으나, 현 박원순 시장이 들어선 후, 최근(2014년 4월) 교통정체 예상과 예산상의 문제 등으로 사실상 복원계획을 포기하였습니다.


돈의문(敦義門) 복원계획 조감도






숭례문(崇禮門) - 국보 제1호 (별칭: 남대문)

남쪽은 예(禮)에 해당하고 오행으로 볼 때, 화(불 火)에 해당하는데 서울의 풍수상 관악산이 화(火 불)의 성격이 강하므로 이를 막기 위해 현판을 다른 대문과는 달리 세로로 써서 달았다.


1962년 12월 20일 국보 제1호로 지정되었다.

현존하는 서울의 목조건물(木造建物) 중 가장 오래된 건물로, 2008년 2월 10일에 발생한 화재로 2층 문루가 소실되고 1층 문루 일부가 불에 탔다. 홍예문과 석축은 남았다.

화재 이후 수습 작업 및 복구를 위한 각종 연구를 진행한 후 2010년 2월 착공식을 거행하고 복구 작업을 시작하였다. 복구 작업은 역사적 고증을 토대로 전통 방식을 그대로 재현하는 데 중점을 두었다. 기존의 것에서 살릴 수 있는 부분은 최대한 살리고, 그 위에 불탄 부분을 재현하였다. 전통 기와를 올리고, 일제시대에 일본에 의해 변형된 부분들을 다시 되돌려 놓는 데 주력했다. 이로써 숭례문은 약 3년의 복구공사를 거친 뒤 2013년 5월 4일 복구 기념식을 거행하고 시민에게 공개되었다.


숭례문 현판 글씨는 누구의 작품인지 확실하지 않다고 합니다.

양녕대군(讓寧大君), 신숙주의 아버지인 신장(申檣), 정난종(鄭闌宗), 유진동(柳辰仝) 등 여러 설이 있습니다.

추사 김정희는 자신의 문집에서 숭례문 편액이 신장의 글씨라며 극찬했다는 기록이 있다고 합니다.

다만 양녕대군 후손들은 양녕대군의 글씨라고 믿고 있다고 합니다.







숙정문(肅靖門) - 사적 제10호 (1963년 1월 21일 지정)

서울성곽을 이루는 사대문(四大門) 가운데 하나로, 도성의 북쪽 대문이다.

1396년(태조 5년) 9월 도성의 나머지 삼대문과 사소문(四小門)이 준공될 때 함께 세워졌다.

원래 이름은 숙청문(肅淸門)으로, 도성 북쪽에 있는 대문이라 하여 북대문· 북문 등으로도 부른다.

1413년 풍수지리학자 최양선(崔揚善)이 지맥을 손상시킨다는 상소를 올린 뒤에는 문을 폐쇄하고 길에 소나무를 심어 통행을 금지하였다. 이후 숙청문은 음양오행 가운데 물을 상징하는 음(陰)에 해당하는 까닭에 나라에 가뭄이 들 때는 기우(祈雨)를 위해 열고, 비가 많이 내리면 닫았다고 한다.

숙청문을 열어 놓으면 음양오행상 장안 부녀자의 풍기가 문란해지므로 항상 문을 닫았다는 속설(俗說)도 전하고 있다.


숙청문이 숙정문으로 바뀐 시기는 정확히 알려져 있지 않다. 숙정문이 처음 기록에 등장하는 것은 1523년(중종 18년)이다. 숙정문 외에 북정문(北靖門)이란 표현도 나오는데, 숙청문과 숙정문이 혼용되다가 뒤에 자연스럽게 숙정문으로 바뀐 것으로 추정된다.

1504년(연산군 10년)에 연산군이 원래 있던 자리에서 오른쪽으로 조금 옮기라고 명령한 기록이 보이는데, 지금의 숙정문은 1976년에 복원한 것이다.

도성 북문이지만, 서울성곽의 나머지 문과는 달리 사람의 출입이 거의 없는 험준한 산악지역에 위치해 실질적인 성문 기능은 하지 않았다. 1968년 1·21사태 이후 청와대 경비를 위해 일반인의 접근을 금지하다가, 2006년 4월부터 서쪽 성곽 0.5㎞, 북쪽의 진입로 0.6㎞ 구간과 함께 다시 일반에 개방하기로 하였다. 1963년 1월 21일 서울성곽에 포함되어 사적 제10호로 지정되었다.


오행사상에 따르자면, 이 문(門) 이름에 “지(智)” 자(字)가 들어가야 하는데 그렇게 안 지은 까닭은...??? 알 수 없네요...

대신 홍지문(弘智門)이 따로 있습니다.



홍지문(弘智門) - 1976년 6월 23일 서울특별시유형문화재 제33호로 지정

홍지문은 숭례문(남대문)이나 흥인지문(동대문)처럼 도성의 중심에 있는 성문과는 달리 서울의 북쪽인 지금의 상명대학교 부근에 위치해 있다.

조선 숙종 41년 한양 도성과 북한산성을 연결하기위해 축조한 탕춘대성의 성문이다.

북쪽은 오행상 智(지)를 상징하므로, 智(지) 자(字)를 넣어 홍지문(弘智門)이라고 이름 지었고, 한성의 북쪽에 있는 문이라는 뜻으로 한북문(漢北門)이라고도 한다.


숙종이 친필로 홍지문이라는 편액을 써 문루에 달면서 공식명칭이 되었다.

1921년 홍수로 인해 붕괴되었던 홍지문을 1977년 도성복원위원회에 의해 복원하었다.

이때 홍지문 현판은 박정희 전 대통령의 글씨로 새겨졌다.





보신각(普信閣) - 서울특별시 기념물 제10호

소재지: 서울특별시 종로구 관철동 45-5


조선시대에 도성 4대문을 여닫는 시각이나 화재발생과 같은 위급한 상황을 알리는 종이 걸려 있던 종루 혹은 종각이었는데 고종 때 다시 지으면서 이름을 보신각으로 바꾸었다.

1396년(태조 5)에 종루를 짓고 도성 문을 열고 닫는 시간을 종을 쳐서 알렸다.

새벽 4시의 아침을 알리는 파루(罷漏)에 도성 문을 열 때는 종을 33번 쳤는데 이는 불교의 33천(天)을 의미한다.

밤 10시의 밤을 알리는 인정(人定)에 도성 문을 닫을 때는 종을 28번 쳤는데 이는 별자리의 28수(宿)를 의미한다.


오행상 중앙은 토(土 흙)에 해당하고 황(黃)색이며 신(信)을 상징합니다.


태조 때 지어진 종루는 원래 인사동에 있었지만 태종 때 지금의 종로로 옮겨졌다.

화재와 전란으로 인하여 자주 소실되고 다시 지어지곤 하였다.

6.25전쟁으로 종각이 파손된 것을 1953년 중건하였다가 1980년 다시 2층 종루로 복원하였다.

지금의 보신각은 원래 종각이 있던 자리와는 상당히 차이가 있다.

또한 원래 보신각에 있던 서울 보신각종(보물 제2호)은 1468년(세조 14)에 주조된 것으로 현재 국립중앙박물관에 있다.

이곳에 있는 종은 1985년에 새로 만들어 설치한 것이다.


편액은 초대 대통령 이승만의 글씨이며 매년 새해 첫날(연말 자정)에 타종하여 한 해의 시작을 알린다.


보신각 터는 1919년 3월 독립선언과 광복 이듬해 3.1절 기념행사의 현장으로서 민족사적인 의미가 깊은 곳이다.


 

 

길 잃은 나그네 - 노래  조광선

'구경' 카테고리의 다른 글

여의도 봄꽃축제 [1]  (0) 2015.04.08
사찰음식  (0) 2015.03.21
가을의 이모저모  (0) 2014.11.17
2014 서울 빛초롱축제  (0) 2014.11.12
마포종점  (0) 2014.11.0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