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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남 대흥사

로제로제 2019. 5. 7. 04:10

해남 대흥사

 

두륜산 대흥사(頭輪山 大興寺) 일주문(一柱門)

"산사(山寺), 한국의 산지승원" -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전남 해남군 삼산면 대흥사길 400 (구림리 799)


대흥사(大興寺)는 우리 국토의 최남단에 위치한 두륜산(頭崙山)의 빼어난 절경을 배경으로 자리한 사찰로서, 대한불교 조계종 22교구의 본사이다.

현재 해남, 목포, 영암, 무안, 신안, 진도, 완도, 강진, 광주 등 9개 시군의 말사를 관할하며, 서·남해 지역 사찰을 주도하고 있다.
두륜산을 대둔산(大芚山)이라 부르기도 했기 때문에 원래 사찰명은 대둔사(大芚寺)였으나, 근대 초기에 대흥사로 명칭을 바꾸었다.

 

대흥사 일주문 부근


일주문 앞의 나무와 돌로 각각 만들어 세운 장승

수조대장(受詔大將)은 사람들의 지극한 소원을 듣고 제석천왕에게 아뢰어 소원을 들어주게 하고

금귀대장(禁鬼大將)은 나쁜 귀신들의 침범을 막아 주는 역할을 하는 장승입니다.

 

대흥사 가람 배치도 - 대흥사 사적 제508호

 

넓은 산간분지에 위치한 대흥사는 가련봉, 두륜봉, 고계봉, 노승봉, 도솔봉, 혈망봉, 향로봉, 연화봉의 8개 봉우리로 들러싸여 있다.

경내는 크게 북원(北院)과 남원(南院), 그리고 표충사 구역과 대광명전 구역의 4구역으로 나뉘어져 건물들이 자리하고 있다.


북원(北院)에는 대웅보전을 중심으로 명부전, 응진당, 산신각, 침계루, 백설당, 대향각, 청운당 등이 위치하고 있으며 금당천(金塘川)을 경계로 하여,

남원(南院)>에는 천불전을 중심으로 용화당, 봉향각, 가허루, 세심당, 적묵당, 정진당, 심검당, 보현전, 문수전 등이 자리하고 있다.

그리고 별원(別院)이라고 할 수 있는 서산대사(西山大師)의 사당인 표충사 구역과 동국선원이 있는 대광명전 구역이 있다.

 

대흥사 부도전

대흥사의 역대 고승들의 부도(浮屠)와 탑비를 봉안한 곳이다.

대흥사 서산대사 탑(大興寺西山大師塔) - 보물 제1347호 (2002년 9월 25일 지정)

서산대사의 사리(舍利)를 봉안한 부도(浮屠)

 

반야교(般若橋)와 대흥사천(大興寺川) 계곡

 

해탈문(解脫門)

 

해탈문 내부

해탈문에 들어서면 왼쪽으로는 코끼리를 타고 있는 보현동자 상(像)이 있고 오른쪽으로는 사자를 타고 있는 문수동지 상(像)이 있습니다.

사자는 대흥사 경내를 향하고 있는 반면에 코끼리는 절의 반대방향을 향하고 있는데 부처님의 지혜를 얻기 위해서는 경내로 들어서고, 속세에 가서는 부처님의 말씀을 실천하라는 뜻이 있다고 합니다.

 

보현보살

보현보살은 석가모니불의 우협시보살로 진리의 광대행을 맡고 있으며, 행원의 실천을 나타내기 위하여 흰 코끼리를 타고 있습니다.

 

문수보살

문수보살은 석가모니불의 좌협시보살로 지혜를 맡고 있으며, 위엄과 용맹을 나타내기 위하여 푸른 사자를 타고 있습니다.

 

해탈문을 지나면 비교적 널따란 경내 뜨락이 펼쳐집니다.

 

세계문화유산

대흥사는 2018년 6월 30일 유네스코 제42차 세계유산위원회에서 "산사(山寺), 한국의 산지승원"이라는 명칭으로 1천 년 넘게 우리 불교문화를 계승하고 지킨 종합승원 7곳 가운데 하나로 그 문화적 가치를 인정받아 한국의 13번째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되었다.

함께 등재된 다른 여섯 곳은 양산 통도사, 영주 부석사, 안동 봉정사, 보은 법주사, 공주 마곡사, 순천 선암사이다.

 

오른쪽으로는 종무소가 있고...

 

왼쪽으로는 전통차도 팔고 기념품도 파는 동다실(東茶室)이 있습니다.

 

경내의 연못 무염지(無染池)

초의선사가 조성했다는 무염지(無染池)는 "더러움에 물들지 않는 연못"이란 뜻.

 

범종루(梵鐘樓)

 

연리근(連理根) - 천년의 인연, 만남, 약속 (보호수 수종: 느티나무 수령: 500년 지정일: 2012.01.27)

두 그루의 나무가 가지가 붙어 있으면 연리지(連理枝)라 하고 뿌리가 붙어 있으면 연리근(連理根)이라 하는데 수령 5백 년이 된 이 느티나무는 두 몸이 하나 되어 부모의 사랑, 부부의 사랑, 연인의 사랑에 비유되므로 "사랑나무"라고도 불린답니다.

 

침계루(枕溪樓)

2층 누각인 침계루는 대웅보전 구역으로 들어가는 문입니다.

침계루(枕溪樓) 편액은 원교 이광사(圓嶠 李匡師 1705~1777)의 글씨입니다.

 

침계루를 통하여 대웅보전으로 들어가기 위해 건너는 심진교(尋眞橋) 밑으로는 금당천(金塘川)이 흐릅니다.

심진교(尋眞橋)는 진리(眞理)를 찾아(尋 찾을 심)가는 다리(橋)라는 뜻이겠지요.

 

안쪽(대웅보전 쪽)에서 본 침계루

침계루를 뒤에서 보면 "원종대가람(圓宗大伽藍)"이라는 편액이 걸려 있는데 "선학(禪學)과 교학(敎學)을 아우르는 큰 가람"이라는 뜻도 있고 원종(圓宗)은 화엄종(華嚴宗)의 별칭이기도 합니다.

 

침계루 2층은 법고(法鼓)ㆍ운판(雲版)ㆍ목어(木魚) 등이 있습니다.

 

대웅보전(大雄寶殿) - 전라남도 유형문화재 제296호 (2008년 9월 19일 지정)


내부의 대들보와 기둥은 휘어진 자연목을 이용했으며, 용두와 칠보문양 등으로 화려하게 치장되어 있다.

석가모니부처와 약사여래부처·아미타여래부처로 이루어진 목조삼존상을 모셨고, 삼장탱·칠성탱·감로탱 등의 불화가 있다.

 

대웅보전 편액 글씨는 원교 이광사(圓嶠 李匡師)의 글씨이다.

 

대웅보전(大雄寶殿) 현판에 얽힌 이야기가 있다.

추사 김정희(秋史 金正喜 1786~1856)가 제주도로 유배를 떠나던 1840년 남도의 명찰 대흥사에 들렀다.

당시 주지는 초의선사(艸衣禪師 1786~1866)였는데 추사는 대웅보전 현판을 보고는 심기가 편치 않았다.

당대 최고의 명필로 자부하던 그는 자신의 글씨를 대흥사에 걸고 싶었기에 초의선사에게 말했다.

당장 원교의 글씨로 된 현판을 떼고 자신의 글씨로 바꿔 걸라고...

8여 년의 세월이 흐른 뒤 겸손과 겸허를 깨닫게 된 추사는 유배를 마치고 다시 대흥사에 들렀다.

"지금도 현판이 그대로 걸려 있는가?" 그러면서 그는 자신의 글씨를 내리고 원래대로 원교의 글씨를 걸라고 했다.

대신에 그는 다른 글씨를 써 주었는데, 대웅전의 우측 백설당의 "무량수각(无量壽閣)" 현판 글씨가 그것이다.

 

해남 대흥사 석가여래삼불좌상(海南 大興寺 釋迦如來三佛坐像) - 보물 제1863호 (2015.03.04 지정)

(아미타불 / 석가모니불 / 약사여래불)

대흥사 대웅보전에는 가운데 석가모니부처와 왼쪽 아미타여래부처, 오른쪽 약사여래부처가 있다.

대흥사 삼존불은 2013년 10월 복장유물 조사를 통해 제작시기가 광해군 4년(1612)에 만들어진 보물급의 가치를 지닌 문화재로 평가받았다.

삼존불은 본존불(本尊佛)과 좌우의 보처불(補處佛)을 이른다.

 

대웅전(大雄殿)과 대웅보전(大雄寶殿)의 차이

원래 대웅전(大雄殿)의 격을 높여서 대웅보전(大雄寶殿)이라고 할 때는 석가모니불의 좌우에 아미타불과 약사여래불을 모시고, 다시 각각의 좌우에 보좌하는 보살을 모신다.

명부전(冥府殿)과 내부 모습

지장보살과 시왕(十王)이 모셔져 있는 전각이다.

지장보살은 부처가 될 수 있었음에도 중생들을 구제하기 위해 남아 있는 보살이다.

지장보살을 모신 곳이므로 지장전(地藏殿)이라고도 하며, 지옥의 심판관 시왕(十王)을 모셨기에 시왕전(十王殿) 또는 저승과 이승을 연결하는 전각이므로 쌍세전(雙世殿)이라고도 한다.

 

"명부전(冥府殿)" 편액은 해사 김성근(海士 金聲根 1835~1919)의 글씨다.

그는 구한말 전라도 관찰사를 지냈다.

그리고 1910년 일제로부터 자작 작위를 받았을 정도로 일제에 적극 협력했다.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보고서]에 친일반민족행위자로 이름이 올라 있다.

 

응진당(應眞堂)과 산신각(山神閣)

같은 전각에 나란히 있다.

석가모니에게는 16제자(羅漢 나한)가 있는데 모든 중생들의 은공에 응할 수 있다고 해서 응진당이라고 이름 지어졌다.

산신각은 불교가 전파되면서 각 지역에 있던 향토신앙을 존중한다는 의미로 지은 건물이다.

우리나라의 향토신앙 중 하나는 산신(山神)을 믿는 것인데 산신령은 호랑이를 부린다고 해서 호랑이와 함께 그려진다.

 

대흥사 응진전 전 삼층석탑(大興寺 應眞殿 前 三層石塔) - 보물 제320호 (1963년 1월 21일 지정)

응진당(應眞堂) 앞에 세워져 있는 삼층석탑은 제작 연대가 통일신라 말기 경으로 추정되고 있다.

1967년 1월 탑 보수 시 상층기단에서 높이 12cm의 동(銅)으로 만든 여래좌상이 발견되었다.

신라의 자장율사가 중국에서 가져온 석가여래의 진신사리를 이곳에 모셨다고 전해진다.

 

윤장대(輪藏臺)

보통 팔각형으로 되어 있는 윤장대는 손잡이가 있어 돌릴 수 있게 되어 있으며, 내부에는 불경을 넣어둔다.

이것을 한 번 돌리면 불경을 한 번 읽는 것과 같은 의미를 지닌다고 한다.

중국 양(梁)나라 때에 선혜대사가 글자를 모르거나 불경을 읽을 시간이 없는 불자를 위하여 처음 만들었다고 전해 오는데 이 윤장대를 돌리면서 하나의 소원을 빌면 하나의 소원이 이루어진다고 한다.


백설당(白雪堂)과 무량수각(无量壽閣)

현판은 두 개가 붙어 있지만 한건물입니다.

무량수각(无量壽閣)은 추사 김정희(秋史 金正喜 1786~1856)의 글씨입니다.

백설당(白雪堂)은 구한말 해사 김성근(海士 金聲根 1835~1919)의 필체입니다.

 

가허루(駕虛褸)

가허루는 천불전을 들어서는 입구에 있는 건물이다.

누각은 2층에 빈 공간이 있는 건물을 말하는데 가허루에는 2층 공간이 없다.

그런데도 단층 건물을 가허루라 이름 지은 것은 휘어진 나무를 이용해 문지방이 땅으로부터 떠있게 만들었기 때문이다.

휘어진 문지방을 1층으로 여기면 그 위의 건물은 자연 2층이 된다.

 

가허루(駕虛褸)는 전주 지방의 명필인 창암 이삼만(蒼巖 李三晩 1770~1847)의 글씨이다.

조선 후기 서민 명필로 이름을 떨쳤던 창암은 글씨를 쓸 종이가 없었을 정도로 생계가 곤궁했다고 한다.

 

젊어서 다른 사람들의 글씨를 폄하하던 추사는 창암의 글씨를 보고 '밥은 먹고 살만한 서생의 글씨'라며 추사보다 16살이나 나이가 많은 창암을 면전에서 무시했다.

제주에서 귀양살이를 하면서 추사는 그 일을 후회했다.

창암의 글씨에도 나름대로의 혼과 뛰어남이 있음을 깨달은 것이다.

 

제주 귀양에서 돌아오는 길에 추사는 사과를 하기 위해 창암을 찾았지만 창암은 이미 죽은 뒤였다.

전북 전주시 용진면에 있는 창암의 부인 광산 김씨 묘비에 창암과 추사, 두 사람의 글씨가 앞뒤로 나란히 새겨져 있는 것은 이런 연유다.

 

가허루의 "가허">(駕虛)"는 "허공을 달리는 수레"라는 뜻이 있다고 한다.

걸림이 없도록 모든 얽매임을 내려놓고 정진하라는...

 

해남 대흥사 천불전(千佛殿) - 보물 제1807호 2013.08.05 지정

천불전은 과거, 현재, 미래에 어느 곳에나 항상 부처님이 계신다는 의미에서 천불을 모신 전각이다.

천불전 건물은 1811년(조선 순조 11년)에 화재로 소실된 것을 1813년에 다시 지었다고 전한다.

천불전에는 경주 불석산(佛石山)의 옥돌로 6년에 걸쳐 만든 1천구의 불상이 중앙의 목조 석가모니 부처님과 문수, 보현 보살을 중심으로 그 주위에 봉안되어 있다.

천불상은 순조 13년(1813)에 천불전을 중건한 완호스님이 풍계대사에게 의뢰해 만들었다고 전해진다.

 

천불전(千佛殿) 편액과 천불전 내부의 천불상

천불상은 전라남도 유형문화재 제52호

천불전 현판은 원교 이광사(圓嶠 李匡師 1705~1777)의 글씨입니다.

 

천불상에 얽힌 이야기

경주에서 만들어진 천불(千佛)을 1817년 두세 척의 배에 나눠 싣고 오던 도중 부산 앞바다에서 태풍을 만나 그 중의 한 척이 표류하여 일본 큐우슈우(九州) 나가사키(長崎)에 닿았다.

 

일본인들은 옥불(玉佛)을 보고 기뻐하면서 절에 봉안하려 하였는데 꿈에 옥불들이 나타나 "우리들은 지금 조선국 해남 대둔사(지금의 대흥사)로 가는 중이니 이곳에 봉안될 수 없다"고 했다.

하는 수 없이 옥불들을 돌려보낼 수 밖에 없었던 일본인들은 옥불에 "日"자를 새겨 넣었다.

그래서 지금도 천불 가운데는 어깨에 "日"자가 새겨진 불상이 있다고...

 

그런 일을 겪고 다음 해인 1818년에야 천불(千佛)을 대둔사(대흥사)에 봉안하게 되었다고 한다.

옥불들은 불교신자들의 꿈에도 나타나 몸이 추우니 가사를 입혀 달라고 해서 불자들은 천불전의 천불상에게 4년마다 가사를 갈아입히고 있다.

벗긴 가사를 지니고 있으면 마음속의 소원이 이루어진다고 하여 많은 이들이 동참한다고 한다.

 

천불전의 아름다운 꽃문살

 

봉향각(奉香閣)

 

용화당(龍華堂) - 전라남도 유형문화재 제93호


관음33응신전(觀音三三應身殿)과 내부

 

대흥사는 한국 33 관음성지 제11호 사찰입니다.

 

세심당(洗心堂)(사진 왼쪽)정진당(精進堂)(사진 오른쪽)

 

적묵당(寂黙堂)

 

대흥사 경내 주변의 꽃과 나무

 

사리탑

 

대흥사의 창건에 대해서는 여러 기록이 있으나 일반적으로는 대흥사를 아도화상이 창건한 것으로 보고 있다.

문화재청이나 전라남도 해남군은 대흥사를 소개하는 글에서 '신라 진흥왕 5년(백제성왕 22년)에 아도화상이 창건하였다고 전한다'고 적고 있다.

대흥사의 역사를 기록한 책으로는 >죽미기>(竹迷記)·<만일암고기>(挽日庵古記)·<북암기>(北庵記) 등이 있다.

 

심검당(尋劍堂)

 

보현전(普賢殿)과 문수전(文殊殿)

보현전과 문수전 사이에는 건물 신축공사가 한창입니다.

 

 

[이 신축공사 중이었던 건물은 2024년 10월 말, 7년 만에 완공된 호국대전(護國大殿)임을 나중에 알게 되었습니다.]

해남 대흥사 호국대전 현판 제막(2024.11.02)

2024년 11월 2일 해남 대흥사에서 열린 2024 대흥사 호국대전 완공기념 문화대축제에 참석한 유인촌 문화체육관광부장관, 명현관 해남군수, 최응천 국가유산청장 등 내빈들이 호국대전 현판을 제막하고 있다. 이날 대흥사는 한국불교의 호국정신을 선양하고 순국 의승군을 추모하는 호국대전 완공 기념 축제를 열었다.<국가유산청 자료>

(2024년 11월 4일 수정・보완)

 

대광명전(大光明殿) - 전라남도 유형문화재 제94호

대광명전이 있는 요사채에는 문재인 대통령이 청년 시절 사법시험 공부를 하며 묵었다는 방이 있다.

 

동국선원(東國禪院)

동국선원(東國禪院) 현판은 추사 김정희(秋史 金正喜 1786~1856)의 글씨.

 

초의선사(艸衣禪師) 동상

대흥사 일원은 조선의 차(茶)문화를 일으키고 정립한 초의선사(艸衣禪師 1786~1866)가 40여 년간 머문 곳이다.

초의선사는 39세 때인 1824년에 일지암을 중건하고 81세로 입적할 때까지 이곳에서 머물며 수행했다.

초의선사는 추사 김정희와 깊은 교류를 가졌으며 다산초당에 유배와 있던 다산 정약용 선생과도 매우 가깝게 지냈다.

대흥사 일지암(一枝庵)에서 초의선사는 동다송(東茶頌)을 지어 차 생활의 멋을 설명하며 차를 재배해 널리 알렸다.

 

호국문(護國門) - 표충사(表忠祠)의 정문

표충사는 왜란(倭亂) 때 나라를 위해 큰 공을 세운 서산대사(西山大師) 등 큰 스님들을 기리는 사당이다.

 

의중당(義重堂)(왼쪽)과 보련각(寶蓮閣)(오른쪽)

의중당(義重堂)은 서산대사의 제사를 지내기 위한 제물을 차리던 건물이다.

보련각(寶蓮閣)은 초의선사가 철종 3년(1852년) 역대 조사들의 진영을 모시기 위해 처음 건립하였다.

 

표충사(表忠祠)와 내부의 서산대사, 사명대사, 처영대사의 진영

표충사(表忠祠)편액은 정조 임금의 글씨이다.

 

표충사는 임진왜란 때의 승군장(僧軍將)이었던 서산대사 휴정과 스승인 서산대사를 도와 큰 공을 세운 사명당 유정, 뇌묵당 처영스님 등을 기리는 사당이다.

본래 사찰에는 부처님을 모시는 당우만 세우는 법인데, 특이하게 대흥사에는 나라를 구한 큰 스님들을 모시는 유교형식의 사당을 조선 조정에서 지었다.

1789년에 정조 임금이 표충사(表忠祠)라는 어필사액(御筆賜額)을 내렸다.

이에 예조에서는 관리를 내려보내 해마다 제사를 모시도록 했으며 표충사 정면의 의중당(義重堂)은 제사 때 제물을 차리던 건물이다.

 

서산대사(西山大師) 휴정(休靜)에게 도총섭(都摠攝)의 직위를 내린다는 선조(宣祖) 임금의 교지 (재발급)

임진왜란 때에 선조 임금이 서산대사에게 선(禪)・교(敎) 양종(兩宗) 도총섭의 직위를 내려 전국의 의승군(義僧軍)을 통솔하게 하였다.

 

대흥사는 조선시대 중기까지만 해도 남도의 조그만 절이었다.

그러나 1606년 정월, 서산대사(西山大師)가 묘향산 원적암에서 마지막 설법을 마친 뒤 입적하면서 그의 의발(衣鉢)을 대흥사에 보관하도록 유언한 후에 유명한 절이 되었다.

의발(衣鉢)은 승려가 입는 법의(法衣) 가사(袈裟)와 승려의 공양 그릇 발우(鉢盂)를 합친 말인데 의발(衣鉢)을 전(傳)한다거나 보관하도록 한다는 말은 법맥(法脈)을 잇게 한다는 말과 동일한 상징성이 있다.

서산대사의 사리(舍利)는 묘향산 묘현사에 안치되었고 영골(靈骨)은 금강산 유점사 북쪽바위에 각각 봉안됐다.

서산대사는 임종 시 자신의 유품을 대흥사에 맡기면서 대흥사의 풍수와 관련해 "삼재불입지처(三災不入之處)요, 만세불훼지지(萬世不毁之地)"라고 말했다고 한다.

"두륜산 대흥사는 전쟁을 비롯한 세 가지 재앙이 닥치지 않을 곳이며 만년 동안 훼손되지 않을 땅"이라는 것이다.

서산대사의 의발(衣鉢)이 대흥사에 보관되면서 대흥사는 크게 일어났다.

1669년에는 서산대사와 사명당, 처영스님 등 세 분의 영정을 모시고 제사를 지내는 표충사(表忠祠)가 지어졌다.

많은 당우가 세워져서 대흥사 경내에는 대웅보전을 비롯하여 침계루, 명부전, 응진당, 천불전, 천불상, 표충사, 대광명전, 일지암, 북미륵암, 성보박물관 등 외에 현재까지도 불사가 계속되고 있다.

 

조사전(祖師殿)과 내부

조사전에는 창건주인 아도화상(阿道和尙)을 위시하여 16분의 진영을 봉안하고 있습니다.

13대종사(大宗師)와 대강사(大講師)의 진영이라고 합니다.

 

표충비각(表忠碑閣)

 

성보박물관(聖寶博物館)

2012년 8월12일 개관되었으며 1층에는 성보관, 송담관, 불화관과 2층에는 서산관, 초의관이 있다.

 

장군샘

이 곳 샘은 여름에는 시원하고 겨울에는 따뜻하며 맑고 상쾌했다고 한다.

해마다 한 번씩 자정 무렵에 물이 소용돌이치며 솟구쳐 오를 때 절의 스님이 이 물을 마시고 모든 질병을 고쳤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예로부터 약을 달이고 차를 끓이는데 이 물을 최고로 여겼으며 장군수라는 이름은 윤선도가 이 곳 승려들의 지혜와 기력을 보고 능히 장군을 낳을 샘이라 하여 하루도 거르지 않고 길어다 먹은 데서 유래된 것이라고 한다.

- 안내문에서 -

 

일주문을 뒤쪽(사찰 안쪽)에서 본 모습

"선림교해 만화도량(禅林教海 澫華道場)"

"참선(禪)의 숲(林)과 가르침(敎)의 바다(海)로 가득 차서(澫) 꽃피우는(華) 도량(道場)"이라는 의미입니다.

참고: 선림교해 만화도량(禅林教海 澫華道場)에서 쓰인 "만" 자(字)는 滿(X)이 아니고澫(O)입니다.

 

이 편액은 서예가 고(故) 운암 조용민(雲菴 趙鏞敏)의 글씨입니다.

 

다음 목적지를 향해 들어왔던 일주문을 나갑니다.

 

땅끝 해남아 - 노래 송 자

 

모든 얽매임을 내려놓으니               

아무런 걸림이 없다고 하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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